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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투렛증후군 연구 기부자를 추억함

중앙일보 2014.01.25 00:10 종합 31면 지면보기
정재승
KAIST 교수
바이오 및 뇌공학과
지난 몇 주간 KAIST는 바빴다. 전 미래산업 대표 정문술 회장으로부터 미래전략과 뇌인지과학 연구에 써달라며 215억원을 기부받았기 때문이다. 기부자의 뜻에 맞게 기부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내부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이 치열했다. 정문술 회장은 2002년에도 KAIST에 300억원의 개인재산을 기부한 바 있다. IT와 BT 융합연구 지원을 위해 300억원을 기부했고, 정부도 이에 상응하는 매칭펀드를 학교에 지원했다. 덕분에 KAIST 캠퍼스에는 정문술 빌딩이 세워졌고, 바이오 및 뇌공학과가 탄생하게 됐다.



 나는 정문술 회장의 기부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교수다. 융합이 홀대받던 시절, 국내 최초로 융합 학과가 만들어져 연구할 수 있는 자리를 얻게 됐고, 이번에도 뇌인지과학 분야와 새롭게 몸담게 된 미래전략대학원에 기부해주니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대학이 기부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곁에서 고민하는 순간을 함께했다. ‘창조적 이타심과 파괴적 이기심이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매 순간 결정해야 한다’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처럼 기부금이 창조적 이타심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문술 기부금을 접하기 전까지 나는 우리나라 대학에 기부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했다. 못 배운 게 한이 돼 평생 떡볶이 장사로 모은 돈을 대학에 기부하는 할머니 소식을 가끔 뉴스에서 접하곤 하지만, 대학은 그 돈을 대기업이 지어준 건물보다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기부자에게 일일이 알려주지 않으며, 상의하며 사용하지도 않는다. 기부금은 대학순위를 높이기 위해 학교가 얻은 스코어일 뿐이다.



 지난 10년간 내가 우리 학과에서 배운 건 기부금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받아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라는 것이다. 기부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항상 상의하며 사용하려는 태도, 기부자가 기부하기 전까지 보낸 치열한 자기 고통의 순간을 잠시나마 상기해보려는 태도 말이다. 우리 학과는 지난 12년간 늘 그런 태도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내게는 이런 태도가 익숙한데, 15년 전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도 기부금 덕분에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의 한 기업 창업주에게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투렛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얼굴을 불규칙하게 찡그리거나 목을 꺾는 행동을 억제할 수 없는 틱 증세를 성인이 돼서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수십억원의 기부금을 투렛 증후군 연구 분야의 유망한 젊은 연구자인 예일대 의대 정신과 브래드 피터슨 교수에게 기부했고, 그가 뽑은 박사후연구원 자리에 지원해 그와 함께 정신과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피터슨 교수는 매년 겨울 기부자를 연구실에 초청해 지난 1년간 우리가 얻은 연구결과를 친절히 소개하고, 기부자 가족과 연구원이 모두 함께 식사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기부금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투렛 증후군 연구 발전에 작게나마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알려 드리려 애썼다. 기부는 기부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이제 나는 대학에 기부하는 것이야말로 오랫동안 내 삶을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게 하는 숭고한 행위라고 믿는다. 대학 총장을 만나 사진 찍고 신문에 한 줄 기사로 실리는 그런 기부 말고, 제대로 하는 기부라면 말이다.



 기부는 기관이 아니라 사람에게 해야 한다. 기부자의 뜻을 대신 이루어줄,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소통하고 늘 상의하며 기부금을 쓸 그런 사람에게 기부해야 한다. 정문술 회장 또한 우리 학과 이광형 교수와의 깊은 신뢰를 통해 기부할 수 있었고, 그것은 우리 모두를 신뢰로 기부금을 사용하도록 만든다. 기부는 돈이 아니라 ‘정신’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언젠가는 작은 돈이라도 대학에 기부해 내 이름을 내건 강연 시리즈를 지원하고, 나를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을 대학 캠퍼스 안에 가꾸고 싶다. 시인 존 던의 말처럼 대학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나 또한 이 아름다운 공간에 내 삶을 영원히 새기고 싶다.



 인생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유산보다 소중한 건 자식들에게 부모의 가치관을 물려주고 그들이 그것을 늘 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50년, 100년이 지난 후에도 자랑스럽게 부모를 회상할 수 있는 다음 세대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기부다. 그래서 기부금은 그 혜택을 받은 이들에게 숫자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로 다가온다. 요즘 마음이 많이 무겁다.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 및 뇌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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