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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32역 소름 돋네 … 김성녀 천의 얼굴 10년

중앙일보 2014.01.23 00:20 종합 20면 지면보기
배우 김성녀는 “내 얼굴은 평범하지만 칠을 하면 바뀔 수 있는 도화지 같다”고 했다. 그는 천 가지 얼굴로 변신하는 배우다. 위 작은 사진은 연극 ‘벽 속의 요정’에서 김성녀가 소화한 캐릭터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극은 배우 예술이라 했다. 연극 ‘벽 속의 요정’은 그야말로 배우 김성녀(64)의 예술이다. 다음달 4∼1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벽 속의 요정’이 올해로 10주년을 맞는다. 1인 32역의 모노드라마다.

또 무대 오르는 연극 '벽속의 요정'
뮤지컬·드라마 … 연기면 뭐든 했다, 그렇게 쌓은 재능 모두 쏟았죠
"오버 말라"는 조연출 아들 대견 … 무대가 행복, 그곳서 빛나고 싶어



10년 동안 500번 넘게 관객 앞에 섰고, 한 번도 빠짐없이 기립 박수를 받았다. 다섯 살 꼬마부터 할머니 역할까지, 천의 얼굴로 변신하는 배우 김성녀는 현실에서도 1인 다역이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극단 미추 대표,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 등 공식 직함만도 여럿이다. 21일 서울 장충동 국립창극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의욕에 넘쳐 보였다. “세월이 참 빠르다”며 “이제 무대에서 빛을 발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50대가 되면서 편안해졌어요. 더 이상 남과 비교하지 않게 됐죠. 나에겐 나만의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감도 생겼지요. ‘벽 속의 요정’은 그 때 만난 작품이에요.”



 20대 땐 내가 가장 예쁘고 잘하는 줄 알았단다. 30대엔 더 예쁘고 더 잘하는 다른 사람이 보여 기가 죽었고, 40대엔 나만 못한 사람이 더 잘 나가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고 했다. 그 세월을 쭉 함께한 이가 남편 손진책(67)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다. 1976년 연극 ‘한네의 승천’ 연출가와 배우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2005년 초연한 ‘벽 속의 요정’은 아내의 데뷔 30주년을 맞아 남편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김성녀가 가장 돋보이는 연극’이 목표였다.





 ‘벽 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때 실화를 해방 후 우리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념 논쟁에 휘말려 평생을 벽장 안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어머니, 벽 속의 아버지를 요정이라 믿고 살아가는 딸. 이들의 가슴 뭉클한 가족애가 밀도 있게 펼쳐진다.



 “워낙 다양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배역 변신 자체는 겁이 안 났어요, 하지만 흉내 내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게 숙제였죠. 32개 캐릭터가 다 살아나오도록 연기하려면 단순한 기술로는 안 되거든요.”



 그는 다작 배우다. 아니, 생계형 배우였기 때문에 다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연극과 뮤지컬·드라마를 넘나들며 나이·성별 구분없이 다양한 배역을 소화했다. 86년 극단 미추를 만든 뒤에는 극단의 ‘밥줄’이었던 마당놀이 주인공을 2011년 1월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맡았다. 연말연시 마당놀이에서 번 돈으로 한때 100명에 달했던 미추 단원들이 1년을 먹고 살았다.



 “‘벽 속의 요정’은 그렇게 30년 동안 키운 재능을 모자이크 하듯 모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무대 장치는 단순해요. 궤짝 두 개와 침대 하나. 나머지 텅 빈 무대를 배우의 연기로만 채우는 거죠.”



 그는 연습을 서울 혜화동 집에서 한다. 연출은 남편, 조연출은 아들(손지형·34). 모두 한 집에 있으니, 공연 이틀 전 무대 리허설까진 집에서도 충분하다.



“이젠 누르면 나올 것처럼 대사가 내 속에 있다”지만, 가끔씩 “그 부분 오버 하지 말라”는 지적을 조연출에게 받는단다. “다른 조연출 같으면 ‘선생님, 선생님’할 일을 아들은 ‘엄마, 그게 아니고’라며 큰소리친다”며 하소연하듯 말하는 그의 표정엔 같은 길을 걷는 후배이자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비쳤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중앙대 교수로서의 그의 임기는 각각 내년 3월, 내후년 2월 끝난다. 남편이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잠시 자신에게 넘겼던 극단 미추 대표 자리도 다시 남편이 맡을 예정이다. 하지만 그의 ‘배우 인생’은 여전히 전성기다. “체력관리를 잘해 ‘벽 속의 요정’ 배우로 20주년, 30주년을 맞고 싶다”는 꿈도 꾼다.



 “무대에서 가장 행복해요. 10년간 ‘벽 속의 요정’을 연기했지만, 무대에 설 때마다 내가 울컥하는 장면, 관객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다 달라요. 할 때마다 새롭고, 그래서 설렙니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성녀=극작가이자 연출가 김향(1921∼99)과 국극 배우 박옥진(1935∼2004) 부부 사이에 1950년 태어났다. 76년 극단 ‘민예’의 ‘한네의 승천’으로 데뷔, 연극 ‘멕베드’ ‘죽음의 소녀’, 뮤지컬 ‘에비타’ ‘7인의 신부’, 드라마 ‘토지’ ‘서울뚝배기’ 등에 출연했다. 백상연기대상·동아연극상·이해랑연극상 등 수상. 90년 단국대 국악학과를 졸업했고, 2000년 중앙대 국악대가 생기면서 전임교수가 돼 국악대 학장을 역임했다. 2012년 3월부터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을 맡아 창극 ‘장화홍련’ ‘배비장전’ 등의 매진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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