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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가 홀로 산길을 걸을 때

중앙일보 2014.01.23 00:10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형경
소설가
중년인 그는 삶이 급격히 변화하던 시기에 의례처럼 주말 야간 산행을 했다. 바위 밑에서 비바크를 할 때면 주변에 백반을 뿌리고 가슴에 짧은 칼 하나를 품고 잠들었다. 또 다른 중년 남자는 월례 행사처럼 등산을 한다. 열두 시간 넘게 산을 타야 한 달 살아낼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 주말이면 집 근처 산에 오르거나, 모임을 만들어 단체 산행을 즐기는 남자들은 더 많다. 그들에게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건강, 친목 도모 등의 이유를 말한다. 가끔은 산에서 맞닥뜨리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정도 얼굴이면 산에서도 먹히지 않겠느냐고.



 남자들이 눙치는 말 뒤에 숨긴 마음속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혼자 조용히 머무를 공간이 필요해 보인다. 현대의 많은 남자들은 집에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있지 못하다. 침실이나 거실뿐 아니라 집 안 전체가 아내 취향에 맞춰 꾸며진 여성의 공간이다. 자식들도 저마다의 공간을 성처럼 수호한다. 하루 치 노동을 끝내고 퇴근하면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은데 집 안 어디에도 마땅한 공간이 없다. 간혹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를 목격할 때면 그들에게 허용된 공간은 그 정도일까 싶다.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심리적 공간도 없다고 느낀다. 관계 지향적인 속성에,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아내들은 남편이 퇴근하면 곁에 머무르면서 낮 동안의 일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친밀감이라 여긴다. 방전 직전의 머릿속을 달래며 아내 말을 듣는 남편들은 간혹 판단, 평가하는 말을 내놓는다. 내면의 불편한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솟구치는 탓이다. 당신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는 일까지 떠맡아야 한다.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고 느끼는 남자들은 틈내어 산이나 낚시터를 찾는다. 숲길을 오래 걷거나 물가에 조용히 머무르며 깊은 숨을 내쉰다. 몸과 마음이 이완되고 평화가 찾아온다. 비로소 내면에도 의식의 공간이 생겨나고 테메노스, 즉 연금술사의 그릇이 만들어진다. 그릇 속에 위험하고 불편한 감정을 쓸어 담은 후 그것이 숙성 변화되어 유익한 성분이 되기를 기다린다. 유전자 속에 기호화되어 있는 야성의 감각도 깨어난다. 백마를 달리며 새벽을 열던 기억, 나무 그림자로 방향을 잡던 원시의 사냥터가 되살아난다. 야생의 자연 공간에서 육체가 단련되고 정신이 제련된다. 그런 시간을 가진 후에는 “내가 좋은가, 산이 좋은가” 하는 아내의 질문도 참을 만해진다. 물론 아내가 산행에 동행하겠다고 나서면 깜짝 놀라겠지만.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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