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한이 강남 개발 일등 공신 … 계획과는 다른 결과, 그게 인생이더라

중앙일보 2014.01.22 00:02 강남통신 8면 지면보기


“서빙고나루나 한강진에서 나룻배 타고 강남 일대를 가보면 길은 달구지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비좁았지. 보이는 건 논과 밭, 그 사이로 배밭이 흩어져 있었고. 낮은 언덕 기슭에 초라한 초가집 몇 채만 보이는 한없이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어.”

강남 개발의 산 증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손정목(86)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회상하는 1960년대 강남 풍경이다. 당시만 해도 남서울이나 영동(嶺東), 한수(漢水) 이남으로 더 많이 불리던 강남 지역은 1962년에 서울에 편입됐다. 지금의 강남구 신사·압구정·논현·삼성·청담·역삼·도곡·대치동은 성동구 언주출장소, 서초구 잠원·반포·서초·방배·양재·우면동은 영등포구 신동출장소에 포함됐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 정식 행정기관을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손 명예교수는 1968년 건설부 산하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을 시작으로 1970년대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등을 지내며 강남 개발을 진두지휘한 강남개발사(史)의 산 증인이다. 달구지 한 대 지나기도 어려운 좁은 길에 초라한 초가집 몇 채 있었던 강남이 어떻게 지금같은 부자 동네 명성을 갖게 됐을까. 그의 서울시립대 2층 연구실에서 강남 개발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강남 개발 시작을 언제로 잡아야할까.



 “1966년에 남서울을 개발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북이 인구나 토지 면에서 모두 포화상태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그해 1월 중순 제3한강교(한남대교·위 사진)가 착공됐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강남 개발의 출발점이었다.”



-강남 개발용으로 한남대교를 건설한 건가.



 “아니다. 당시 강남 개발은 서울시의 당면 과제가 아니었다. 한남대교는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만들었다. 6·25 전쟁 때 서울시민이 겪었던 피란의 쓰라린 아픔은 체험자가 아니면 모른다. 1960년대만 해도 항상 북한의 재침공을 걱정할 때다. 게다가 서울 인구가 6·25때보다 두 배 는 300만명이 넘었는데 다리는 제1한강교(한강대교)와 광진교 2개뿐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군대나 피란민을 어떻게 옮길 지 고민이 컸다. 그 결과가 1966년 1월 19일 한남대교 착공이다. 신문 기사가 전무했다. 그만큼 아무도 관심없었던 거다.”



-한남대교는 지금 기준으로도 규모가 크다. 피란이나 군사 이동을 감안해 그렇게 설계한 건가.



 “그건 아니다. 원래 4차선, 20m 너비로 설계됐다. 그런데 기초공사까지 마친 상태에서 육군대령 출신인 서정우 건설부 국토보전국장이 6차선, 26m로 넓히라고 지시했다. 그 무렵 북한에서 평양 대동강에 너비 25m짜리 교량을 건설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1m라도 더 넓어야 한다’고 주장한 거다. 다들 ‘비경제적. 오히려 폭격이 집중될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때는 북한과의 경쟁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결과적으로 이때 확장한 덕에 훗날 경부고속도로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



-강남 땅값도 이때부터 비싸진 건가.



 “그렇다. 한남대교 착공 당시 신사동 땅값은 3.3㎡(평)당 200원 정도였다. 당시 강북의 대표적 고급 주택가는 신당동이었는데 거긴 3.3㎡(평)당 가격이 3만원이었다.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각각 400원쯤 했고. 이때가 짜장면 한 그릇에 40원 하던 때다. 그러니까 짜장면 10그릇이면 압구정동에 땅 한평을 살 수 있었던 거다. 착공 후 1년이 지나자 압구정동이 3.3㎡(평)당 3000원으로 뛰더라. 말죽거리(양재) 일대는 4000~5000원에 거래됐다. 압구정동은 홍수 때마다 침수되는 지역이라 그때만 해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양재동이 그래서 더 비쌌다. 압구정동 땅값은 2000~3000원대로 양재동 절반 가격이었는데도 아무도 안 샀다. 강남 개발이 거의 마무리된 1979년 신당동은 3.3㎡(평)당 50만원, 압구정동은 35만원, 신사동은 40만원 하더라. 그러다 1980년 들어 강남 땅값이 역전했다. 15년 동안 강북 땅값이 15배 뛰었는데 강남은 2000배 뛴 거다.”



-1970년대도 땅투기가 심했나.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땅 수 십만평을 사모은 사람이 있었다. 종로구에 사는 김형목과 조봉구(오른쪽 사진)라는 사람이었다. 김형목은 주로 선릉을 중심으로 청담·삼성·대치동 땅을 3.3㎡(평)당 90~120원씩 40만평(※이하의 땅 규모는 당시 통용되던 평으로 표기했음) 구입했다. 주로 구(舊) 왕실 재산이었다. 조봉구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주로 샀는데 역삼·도곡동에 집중했다. 등기로는 37만7400평이 등록돼 있었는데 실제로는 60만평 정도 된다고 들었다. 김형목이 누군가 하면 훗날 영동백화점과 영동고를 설립한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 강남구청 자리도 그가 서울시에 기증한 땅이다. 강남교육청, 강남도서관, 구 영동백화점 주변 논현동 일대, 강남구청 뒤 해청아파트, 청담동 청실·홍실 아파트 자리 등이 전부 김형목의 땅이었다. 가수 조덕배 삼촌인 조봉구는 건설회사 삼호를 창업했다. 역삼역 근처 삼호아파트, 개나리아파트, 삼호쇼핑센터 등이 그가 지은 거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현금 제일 많은 사람 1~2위를 다퉜다. 소위 ‘복부인’도 이때 나타났다. 하지만 진짜 큰손은 따로 있었다.”



-그게 누군가.



 “윤진우. 내 직전 도시계획국장이었다. 그가 수십 만평 단위로 땅을 사면 나머지 자투리땅 수백~수천평을 복부인들이 사는 식이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 땅투기를 했다는 말인가.



 “정치적 사정이 있었다. 1970년 초 그가 강남 일대 땅을 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당시 박종규 청와대 비서실장 지시였다. 그때 24만평을 구입한 뒤 18만평을 다시 팔았다. 윤 국장이 땅을 싸게 사들였다가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식이었다. 그렇게 20억원, 지금으로 치면 5000억원 넘는 돈을 마련했다. 이 자금이 1971년 대선과 총선 정치자금으로 쓰였다더라. 안 팔고 남은 땅 6만2000평은 김성곤(쌍용 설립자)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에게 줬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대치동 쌍용아파트 자리다.”



-여권 실세에게 좋은 땅을 상납한 건가.



 “청와대가 땅 살 돈을 넉넉하게 준 건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땅 살 때 김성곤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은 땅을 준 것 아닐까. 물론 이건 내 추측일 뿐이다. 그런데 그 땅이 좋은 땅은 아니었다. 2000평은 테헤란로 1급지였지만 나머지 6만평은 대치동 돌산이었다. 당시엔 ‘저 땅을 쓸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제불능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심각한 골재(자갈·모래) 부족현상이 벌어졌다. 그때 대치동 돌산을 중장비로 깨서 1급 골재로 썼다. 그리고 이 터에 쌍용아파트를 지은 거다. 요즘도 대치동 지나가면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런데 전임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나와 동향(경주) 사람인 데다 모교 선후배 관계다. 1995년에 그가 서류 한보따리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그가 사고 판 땅 매매 서류더라. 거기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었다.”



-본인은 그런 일은 안했나.



 “1974년 유신개헌 후 민심이 뒤숭숭하고 사회 불만이 높아지니 정부가 국민 관심을 돌리려고 고급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했다. 윤 국장은 이때 퇴출됐다. 본인은 큰 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대단히 서운했을 거다. 윤 국장 퇴출 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게 나다. 윤 국장 이후로는 청와대에서 더이상 그런 주문이 없었다.”



-공무원으로 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잠실 개발(위 사진)이다. 1972년 섬이었던 잠실을 쓰레기를 매립해 육지랑 연결하고 택지와 종합운동장 부지로 만들었다. 당시 건축부지를 최소면적 50평, 건폐율을 40%로 제한했다. 50평 가진 사람이 집 지을 때 집 면적이 20평이고 나머지 30평은 정원 만들거나 차고로 이용하게 한 거다. 오늘날 강남 건물이 다른 구에 비해 여유가 있는 데다 고급주택으로 채워진 건 이 덕분이다. 비난도 많았다. 당시 1인당 소득이 310달러에 불과했고 주택난이 심각했다. 1가구당 주거 평균 면적이 10평 남짓할 때다. 경제 실정을 모르는 조치라고 욕을 많이 먹었다.”



 -처음부터 고급 단지로 조성했으니 부자들이 너도나도 강남에 입주했겠다.



 “아니다. 다들 강남에 안 오려고 해서 고생했다. 오죽했으면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를 지어 공무원이라도 이주시키려 했겠나. 강남을 개발해 사람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 1972년에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이 학군 이동 아이디어를 냈다.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 등 5개 공립 학교와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 5대 사립이 당시 명문이다. 여학교로는 경기·이화·숙명·창덕·진명·정신을 알아줬고. 모두 종로구나 중구에 있었다. 이 학교들을 모두 강남으로 이동하는 구상이었다. 그러면 인구가 이동하며 강남이 빨리 개발될 거로 봤다.”



-저항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여론주도층이 모두 동문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지배층의 추억과 향수가 배어있지 않나. 그들 부인도 다들 그곳 출신이었다. 한국의 동문과 재학생은 물론 재외동문까지 나서 반대했다. 엄청난 파워더라. 경기고의 저항이 가장 심했는데 결국 화동(이전 전 위치)의 교사(校舍)는 허물지 않고 말끔하게 개수해 도서관으로 쓰고 교정도 단장해 도서관 뜰로 남긴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1972년 10월 삼성동 이전을 발표했다. 당시 경기고 땅은 1만1000평이었는데 이걸 3만2250평으로 보상해주고 새 건물을 지어준다는 조건도 추가했다. 아마 유신시절 중앙정부의 유일한 패배였을 거다.”



-강남 개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뭘까.



 “지하철 2호선(위 사진)이다. 2호선이 생기면서 강남의 대중교통망이 연결됐다. 2호선 탄생 과정을 보면 지금 생각해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다. 당시 구자춘 시장이 어느 날 각 국·과장을 모아놓고는 갑자기 2호선 착공을 지시했다. 서울시 지도를 펼쳐놓더니 서울시청에서 시작해서 쭈욱 큰 타원형의 지하철 노선을 그리더라. ‘영등포도 들어가야겠지, 여기도 들어가야지’ 하면서… , 굉장히 즉흥적이었다.”



-즉흥적이긴 했지만 성공한 것 아닌가.



 “군 출신이라 그런지 추진력이 있었다. 또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신임을 받는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나는 그때 반대했다. 순환선은 시기상 이르다고 생각했다. 2호선이 강남고속터미널을 안 지나가지 않나. 너무 빨리 만들어서 그렇게 된 거다. 그걸 3호선이 뒤집어 썼다. 압구정동에서 바로 양재쪽으로 빠지는 직선 코스를 놔두고 엉뚱하게 신사·잠원·반포를 거쳐 가는 곡선형이 됐다.”



-강남 개발로 돈 번 사람이 많다. 온갖 정보를 쥐고 있었으니 수백억원은 벌었을 것 같다.



 “전혀. 늘 남보다 1년 정도 빨리 개발 정보를 알았다. 돈가방을 싸들고 와서 알려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땅을 사지도, 정보를 돈 받고 팔지도 않았다. 돈벼락 맞으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강남의 대표적 땅부자인 김형목이나 조봉구도 그렇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김형목은 자식 문제로 속을 썩였고, 조봉구도 삼호 파산 뒤 미국의 작은 원룸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하더라. 인생이 그런 거다.”



-매일 대학 연구실에 출근한다. 무슨 일을 하나.



 “3·15 부정선거에 관련한 책을 쓰고 있다. 내가 1951년 고등고시 행정과(행정고시) 2회 합격해서 30세에 경북 예천군수를 했다. 최연소 군수였다. 그러다 3·15 부정선거 관련자로 실직했다. 3·15 부정선거는 아직 베일에 쌓여있는 게 많다. 내가 3·15 원흉이니 다 알고 있다. 조만간 다 쓸 것 같다.”



글=유성운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손정목(86)

현재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1928년 경북 경주 출생

1994년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장·도시행정대학원장 등 거쳐 정년퇴임

1977년 서울시립대학교 도시행정학과 부교수 부임

1975년 서울시 내무국장(3월),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장(9월, 현 서울특별시인재개발원)

1971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기획관리관 겸임

1970년 중앙공무원교육원 부원장(6월),서울시 기획관리관(7월)

1963년 행정서기관으로 복직, 중앙공무원교육원 교수부 근무

1960년 3·15 부정선거 관계자로 의원면직(依願免職) 후 3년간 실직

1959년 경상북도 지도과장

1957년 경상북도 예천군수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경상북도 지방과 수습행정관으로 공직 시작

1950년 고려대 법학과 2학년 편입했으나 6·25로 학업 포기

1949년 대구대(현 영남대) 법과 전문부 졸업

1946년 경주중(계림초등학교 1936년 입학) 졸업

 



사는곳: 동대문구 전농동

근무하는 곳: 서울시립대 중앙도서관 손정목 문고실

운동하는 곳: 안함

쇼핑하는 곳: 안함

자주가는 식당: 대학 구내식당

가족관계: 2남 2녀, 아내와는 사별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