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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칼럼] 세미나장의 단골 노인들

중앙일보 2014.01.15 00:10 종합 31면 지면보기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얼마 전까지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미나장을 단골로 다니며 소일하는 노년층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나는 관심 있는 분야를 좀 더 파고들 겸 덩달아 글감도 얻어볼 겸 이런저런 세미나에 종종 참석하는 편이다. 주최 측의 초청을 받아 가끔 주제발표나 토론자로 나서기도 한다. 세미나, 심포지엄, 토론회, 집담회(集談會) 등 명칭은 다양하지만 진행하는 순서는 대개 비슷하다.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하고 참석자들을 소개하고, 주제발표에 이어 토론자의 코멘트나 질문, 그에 대한 발표자의 답변, 마지막으로 청중 가운데서 몇 명을 골라 질의응답을 하게 된다.



 문화 관련 세미나에 가면 낯익은 얼굴이 많은 편이다. 낯이 설더라도 연세가 좀 많지 싶으면 먼저 다가가 인사드리고 명함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내 인사에 어색한 표정으로 건성 응대만 하고 시선을 돌리는 분들이 가끔 있다. 한 세미나장에서 뵌 분을 며칠 후 다른 토론회장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아는 교수님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서울 중심가의 한국프레스센터·상공회의소 등 세미나가 빈번히 열리는 곳을 단골로 드나드는 노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조용히 앉아 발표 내용을 경청만 하고 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주제와 동떨어진 질문을 던지거나 개인적인 한탄·울분을 쏟아내 사회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분도 있다고 했다.



 세미나에 이골이 난 이들의 경험을 종합해보면 세미나 단골 노인이라 해서 다 같은 부류는 아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경우가 은퇴한 전문가 그룹이다. 전직 교수·관리·외교관들이 자기가 평생 몸담았던 분야에 관한 세미나에 가서 열심히 듣고 질문하는 식이다. 눈썰미 있는 사회자라면 대선배를 먼저 알아보고 청중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부산에서 열린 한·일관계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분명히 서울에 사는 전직 외교관이 그곳까지 와서 오후 내내 자리를 지키고 질문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한 적도 있다. 전문성과 상관없이 심심파적으로 세미나장을 드나드는 노인들도 있다. 취미치고는 고급 취미인 셈이다. 아마 사람이 그리운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아무리 정보화 시대라 해도 현재의 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 세대다. 스마트폰은 아직 손에 설고, TV도 진짜 사람 냄새는 흉내 내지 못한다. 이를테면 선거운동도 SNS가 아니라 옛 여의도광장·보라매공원의 대규모 인파, 후보의 목쉰 사자후(獅子吼)가 훨씬 더 아련한 세대다. 얼굴과 얼굴, 입과 입들이 부딪치는 세미나장의 살냄새가 이런 노인들을 유혹하는 것 아닐까. 물론 애처로운 식객형도 있단다. 음료나 간단한 다과가 준비된 세미나장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행색 남루한 노인들이 배회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다과를 준비하지 않는 주최 측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더라도 세미나장이라는 곳은 문외한이 죽치고 있기에는 불편한 자리다. 최소한의 지적 능력과 호기심 없이는 지루하기만 한 자리다. 비록 참석한 국회의원이 축사하고 동료 의원들을 소개하고 나서는 함께 휙 자리를 떠버려 남은 개털(?)들끼리 본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사회의 따끈한 현안들이 제기되고 요리되는 중요한 장소다. 노인들은 무엇 때문에 딱딱한 세미나장을 찾는 것일까. 지난해 열린 ‘국민 노후보장 패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한국 노년층의 여가활동 유형화 및 영향요인 분석’ 논문(황남희 박사)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년층의 72%가 여가부족형, 즉 특별한 여가활동 없이 심심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발간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중·노년층의 삶의 질과 정책과제’ 보고서도 “노년층의 삶의 질 수준은 매우 낮으며, 특히 공연문화 활동 등 사회참여 영역이 가장 저조한 실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운 세미나장을 찾을 리는 없다. 대한민국의 인구 고령화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고령화와 함께 진행되는 고학력화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통계청의 인구총조사를 들여다보면 1990년에는 60세 이상 연령층 중 전문대 졸업 이상 학력자가 10만7725명, 비율로는 3.24%였다. 2010년에는 이 수치가 78만3546명, 10.3%로 확 늘어났다. 절대 숫자로도 비율로도 대폭 증가했고, 앞으로 이 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게 뻔하다. 1990년의 대학진학률은 27.1%였다. 2010년에는 75.4%나 된다. 앞으로 단군 이래 최고 학력을 갖춘 노인들이 더 많이 세미나장을 찾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들의 지적 갈증과 욕구를 채워줄 대책은 마련돼 있는가. 지적 능력을 활용할 방안은 있는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못하는 법이다.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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