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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차 마시기 좋은 이는 검소한 덕을 갖춘 사람”

중앙선데이 2014.01.12 01:45 357호 24면 지면보기
전남 승주의 야산, 대나무 숲 사이에서 자라는 야생 죽로차(竹露茶). 오른쪽 아래 낮은 수목들로 이름엔 대이슬로 자라 맛이 좋다는 뜻이 담겼다. [사진 박동춘]
중국 파·촉 지역에서 발원한 차(茶) 문화의 역사는 유구하다. 가장 고대의 기록은 춘추시대(BC 8~BC 3세기)에 시작된다. 『안자춘추』에 “안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이었을 때 거친 밥과 세 꼬치의 구운 고기, 계란 5개, 차 나물을 먹었을 뿐이다”고 했다. 차를 음식, 즉 나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차(茶)와 사람 ① 다성(茶聖) 육우

증거는 기록을 훨씬 앞선다. BC 5000년께 차가 음식 재료로 이용된 흔적은 1974년 저장(浙江)성 위야오(余姚)의 허무두(河姆渡) 유적지에서 발굴된 차나무 뿌리에서도 확인된다. 농부가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한 이곳에선 다양한 유물이 발굴됐다. 특히 부엌으로 추정되는 곳 인근에서 열을 지어 심어진 차나무 뿌리가 발굴돼 차의 역사를 선사시대로 끌어올렸다.

차가 서한시대 귀족묘의 부장품으로 활용됐음을 보여주는 목간. 고사라는 글이 적혀 있다. 고는 차란 뜻이다.
1972년 발굴된 창사(長沙)의 마왕퇴 서한 2·3호 묘에서 ‘고사(笥)’라고 쓴 목패(木牌)가 출토된 것도 의미 있다. 어떤 연구 보고서엔 중국 학자가 “고()는 가(檟,차의 별칭)의 이체(異體), 사(笥)는 대나무로 만든 상자다. BC 168년께 서한 시대에도 귀족 묘의 부장품으로 차가 쓰였음이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도 있다.

후한 초기 문헌 『이아(爾雅)』에도 차를 ‘도(荼)’라고 한 기록이 있다. 후한 허신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도(荼)는 고도(苦荼)인데 지금의 차(茶)다”고 말했다. 위(魏)나라 장집(張楫)이 편찬한 『광아』는 삼국시대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유행했던 음다법이 기록돼 있다.

차는 불교와도 융합됐다. 선종의 6조 혜능(638~713) 이후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풍속이 널리 퍼진 것으로 짐작된다. 광둥(廣東) 지역을 중심으로 선풍을 드날렸던 혜능의 제자들은 수행할 때 차를 마셨는데, 이들이 수행했던 광둥·장시(江西) 지역은 차의 주산지였다.

호북성 기념관에 있는 육우의 초상.
당나라 중기에 차는 민간까지 확산한다. 그리고 당의 문인 육우(陸羽·733~804)가 차 문화를 집대성한다. 육우는 성당(盛唐) 때 인물로,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시후(西湖)의 강가에 버려졌다. 그를 거둔 용개사 적공(積公)은 차를 즐기는 승려였는데 그렇게 그는 차를 처음 접했다. 어릴 때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육우란 이름은 뒤에 스스로 지었다. 성인이 돼 주역 점을 쳤는데 건괘가 나와 풀어 보니 “큰 기러기가 서서히 땅에서 날아오른다”는 뜻이었다. 이때부터 이름을 육우라 스스로 지었다.

그는 24세 때 안녹산의 난(755~763)이 일어나 여러 지방을 다녀야 했다. 가는 곳마다 샘물을 맛보면서 차에 적당한 물인지를 품평했는데, 이때 그가 품평한 명천(名泉)들의 물은 아직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 천하를 주유하면서 많은 사람과 교유했는데, 특히 큰 영향을 준 인물로 훙저우(洪州)에서 만난 교연(皎然)이 있다. 교연은 시승(詩僧)이라 칭송되며 안진경(顔眞卿·709~785)·황보증(皇甫曾·?~?)·유장경(劉長卿·709~780) 등과 어울렸던 당대의 문사다.

육우와 교연은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육우는 교연의 수행처인 묘희사(妙喜寺)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내왕하면서 차와 시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교연이 차 밭을 가꾸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차나무의 생육과 제조 과정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이들의 교유가 깊어진 어느 해 가을, 국화를 감상하며 차를 즐긴 광경은 교연의 시 ‘구일여육처사우음다(九日與陸處士羽飮茶)’에 자세히 나온다. 육우도 화답시를 지었으련만 세상엔 교연의 시만 전해진다.

9일, 산승의 암자엔
(九日山僧院)
노란 국화가 동쪽 울타리에 활짝 피었네
(東籬菊也黃)
속인들은 흔히 술에 (국화를) 띄우겠지만
(俗人多泛酒)
누가 (국화 향이) 차 향을 돕는지를 알리요
(誰借助茶香)

9월 9일은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 중구일 혹은 중양절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은 중양절에 단풍이나 국화를 감상할 줄 알았다. 바로 이런 날, 교연의 암자를 찾았던 육우는 담연(淡然)한 풍류를 즐겼다. 동쪽 울타리에 만발한 노란 국화와 산중의 암자. 차를 즐길 최상의 조건이었다. 세상 사람은 국화를 술잔에 띄워 속된 풍류를 즐기지만 이는 은근한 국화 향을 욕되게 하는 것일 뿐 거기서 조용하고 담담한 풍류를 완상하기란 어려울 거라는 게 교연의 생각이었다. 차는 원래 품성이 그렇다. 공명(空名)에 귀 밝은 자들이 향유하기엔 너무 담담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래서 육우는 “차를 마시기에 좋은 사람은 성의 있는 행실과 검소한 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했다.

육우는 단양(丹陽) 여행길에 평생의 지기가 된 황보증을 만난다. 우정은 각별했다. 한번은 육우의 명성을 들은 창저우(常州) 자사가 그의 브랜드인 양선차(陽羨茶) 만량을 왕실에 올리라고 명했다. 육우에겐 자신의 차가 처음 황실로 진상되는 영광스러운 기회였다. 그런데 황보증이 병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사를 제치고 단걸음에 달려간다. 아픈 벗을 지키며 지성으로 보살피고 차를 마시게 하여 병을 낫게 한 것은 물론이다.

황보증은 막역한 벗이자 당대 최고의 문사인 안진경을 육우에게 소개한다. 황보증은 ‘송육홍점산인채다회(送陸鴻漸山人採茶回)’를 지어 깊은 산으로 차를 따러 가는 육우의 모습을 그렸는데, 차에 대한 육우의 열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뭇 산봉우리는 은자를 기다리고
(千峰待逋客)
향기로운 차, 다복하게 자라네
(香茗復叢生)
차 따는 곳이 깊은 곳임을 알고
(採摘知深處)
고요한 산, 홀로 가는 것이 부럽구나
(煙霞羨獨行)
그윽한 기약을 한 산사는 고요하고
(幽期山寺遠)
거친 밥, 맑은 물뿐이라네
(野飯石泉淸)


천하의 명필 안진경은 육우의 벗이자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안진경이 저장성 후저우(湖洲) 자사로 부임해 『운해경원(韻海鏡源)』을 편찬할 때 육우를 참여시켰고 문사들을 불러 연회할 때마다 육우를 불러 그의 차를 소개했다. 이들의 우정은 저산(杼山)의 묘희사 근처 ‘삼계정(三癸亭)’을 세울 때도 드러난다. 후인들은 이들의 우정을 기려 후저우의 삼절(三絶)로 칭송했는데 계축년, 계축월, 계축일에 완성됐다고 하여 삼계정이라고 했다.

육우는 764년 차의 이론을 정립한 『다경』을 저술해 중국의 차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해 체계를 세웠으며 차의 근원과 차 도구, 제다법, 찻그릇에 대한 참신한 기준을 제시했다. 차를 달이는 방법도 이론화하고, 정신을 맑게 하려면 차를 마셔야 한다는 음다의 준칙을 세웠다. 차의 역사를 수집했고, 차의 산지와 다도의 격식을 꼼꼼히 밝혔다. 그의 이러한 차에 대한 이론은 후대 차의 규범적인 준칙이 됐다. 오늘날 육우를 ‘다성(茶聖)’으로 칭송하는 이유다.

그가 만든 자다법(煮茶法)을 연마해 차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종전 파나 생강, 귤 등을 넣고 끓이던 것과 달리 차를 달일 때 소금을 넣어 차의 효능을 극대화했다. 그의 이런 음다법은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은 차의 몸이며 차는 물에 의해 색향기미를 드러낸다’는 만고의 진리는 육우가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다경』엔 또 ‘월주에서 나는 다완이 상품이다. 월주 다완은 차색을 돋보이게 한다’고 돼 있다. 이는 다완(차 전용 찻잔)의 중요성을 제시한 것이다. 다완의 예술미는 다탕의 완성도와 함께 꽃핀다.

또 ‘다완에 차를 따를 때 말발을 고르게 나눈다. 말발은 다탕의 아름다움이다’고 하였다. 화려하게 핀 말발은 다탕의 꽃이다. 육우는 차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차의 아름다움은 불과 물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그 이치를 알았던 차의 성인 육우는 자신이 만든 풍로에 원리를 새겼다. ‘손(巽)괘는 바람을 주재하고, 이(離)괘는 물을 주재하고, 감(坎)괘는 물을 주재한다. 바람은 불을 일으키고, 불은 물을 끓게 한다’.

차가 한반도에 언제 소개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에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선종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새로운 선지식을 찾아 당으로 간 구법승(求法僧)은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선종에 뜻을 둔 승려들은 장시로, 교학 승려들은 당의 수도인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으로 모였다. 신라의 구법승들은 대개 마조계의 문하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 이들이 귀국하면서 차와 다구를 가져왔지만 선종 도입 초기엔 차가 널리 퍼지지 않았다. 당시 교종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승려들 활동은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7세기 전후에 들어온 차는 널리 퍼지지 못하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로 쓰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미미했던 차의 향기엔 불씨가 실려 신라 말 이후 차 문화는 큰 꽃을 피울 수 있게 됐다.



차 용어

-음다(飮茶): 차를 마시는 것

-자다(煮茶): 차를 달이는 법을 가리키는 당나라 용어. 시대마다 달라졌다. 송대는 팽다(烹茶), 점다(點茶), 명대는 전다(煎茶)였다. 현대엔 행다(行茶)라는 용어를 쓰는데 의미가 확장돼 차를 달일 뿐 아니라 내놓는 모든 절차를 가리킨다.

-차를 달이다: 차를 물에 넣어 우리는 것

-다탕(茶湯): 차를 우린 물

-말발(沫餑): 차의 거품

-다완(茶碗): 차 마실 때 쓰는 그릇



박동춘 철학 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전남 승주에서 차를 만들며 초의의 다법을 전승·연구하고 있다. 저서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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