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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되는 건 소멸의 나락에 빠지는 일이기에 …

중앙선데이 2014.01.12 01:50 357호 25면 지면보기
우주는 크고 지구는 작다. (a) 우주의 한 작은 부분, (b) 은하수, (c) 오리온 팔, (d) 태양계, (e) 지구.
우주가 너무 크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다. 모든 상상력을 총동원해 봐야 인간의 작은 뇌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크기다. 130억 년 전 빅뱅(Big Bang) 이후 계속 팽창해 오늘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우주의 반경은 460억 광년 정도다. 보이는 우주엔 1000억 개가 넘는 은하계들이 존재하며 인간은 그중 하나인 은하수에 살고 있다. 태양을 보자. ‘무적의 태양(Sol Invictus)’이라며 후기 로마황제들이 숭배하고 고대 아스테카 사람들이 태양신 ‘토나티우’를 위해 흑요석 칼로 매년 2만 명의 심장을 도려내 바치지 않았던가?

김대식의 'Big Questions' <19> 인간은 무엇을 가장 무서워하나

하지만 태양은 무적이지도, 그다지 위대하지도, 피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제물로 원하지도 않는다. 은하수의 3000억 개 별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고 위치가 특별한 것도 아니다. ‘페르세우스 팔’ ‘백조 팔’ ‘방패-남십자 팔’ ‘궁수자리 팔’이라고 불리는 4개의 은하수 주요 나선들에 포함되지도 못한다. 은하수 변두리에 있는 페르세우스와 궁수자리 팔들 사이엔 작은 2차 나선이 하나 있다. 태양계가 속해 있는 ‘오리온 팔’이다. 태양, 지구, 한반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들, 엄마 품 안에 안겨 한없이 행복한 아이, 임기 5년 만에 머리가 하얘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대학에 떨어져 자살하려는 학생, 결혼 피로연 손님들을 테러범으로 착각해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하는 무인정찰기…. 이 모두가 다 시속 82만8000㎞의 속도로 은하수 ‘센터’를 돌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우주는 크고 인간은 작다. 진화의 우연 덕분에 인간에겐 지능이 생겼다. 지능이 있기에 ‘나’란 존재를 알고 세상을 알아본다. 기억이 생겨 과거를 기억하고 아직 기억할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려 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승리와 행복보다는 좌절이고 아픔이고 실망이다. 과거는 확실하기에, 인간에게 실망과 아픔과 좌절의 존재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만약 미래가 과거의 확률적 연속이라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더 많은 실망과 아픔뿐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안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끝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해 무려 70일 동안 썩어가는 시체들을 정성껏 미라로 보존하려 했던 고대 이집트인들마저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아무도 죽음의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고대 이집트의 편지 내용 중).

영장류 뇌가 클수록 집단 규모도 커져
끝없이 큰 우주 안에 깨알보다도 작은 지구란 돌덩어리에 이유 없이 던져져 살다 또 이유 없이 사라지는 우리들이기에, 외로움이란 어쩌면 인간의 기본 조건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는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던가?

“철학?/ 나무들에게 무슨 철학이 있을까?/ 푸르고, 잎사귀에 가지 달고/ 계절마다 열매 맺으면/ 우리는 그냥 생각 없이 받아들이지/ 알아보지도 못하며/ 그런 나무의 철학보다 더 뛰어난 철학이 있을까?/ 왜 사는지 모르며 모르는 걸 모르며 사는.”

물론 인간은 나무로 살 수 없다. 아무리 나무라 상상하고 ‘생각’이란 단어가 무의미한 나무같이 살기를 원해도, 결국 나무라 상상하고 나무같이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뇌의 무게는 체중의 단 2%에 불과하지만 뇌는 인간이 섭취한 에너지의 20%를 소비한다. 그리고 뇌에겐 공휴일이란 없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달된 뇌를 가져봐야 혼자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홀로인 인간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 바위에 긁히기만 해도 피가 나고 목을 살짝 뒤틀기만 해도 질식한다. 그다지 빠르지도 않다. 치타는 시속 100㎞, 말은 시속 88㎞, 그레이하운드는 시속 70㎞까지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육상 1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사인 볼트마저도 시속 45㎞를 넘지 못한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시속 48㎞)보다도 느리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동물들보다 더 약하고 느리고 겁 많은 인간들이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영장류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에겐 부모가 있고 부모는 가족을 만들고 가족에겐 친척들이 있다. ‘이민’이란 단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시대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렇게 유전적 친척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살았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영장류 뇌 크기와 집단 크기는 보통 1 대 1의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뇌가 크면 클수록 더욱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기억할 수 있기에 더 큰 그룹 유지가 가능해진다. ‘던바의 수’라고 불리는 이 관계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우리 인간들의 ‘자연적’ 그룹의 크기는 약 150명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회적 그룹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혼자로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우리’라는 그룹 간의 협동과 역할 분담 덕분에 나보다 더 빠르고 더 힘세고 더 거친 동물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년). [위키피디아]
가장 이상적인 인생은 ‘홀로 함께’ 사는 것
혼자는 위험하고 같이는 안전하다. 커진 뇌 덕분에 ‘나’라는 독립적 자아를 가지게 된 인간이지만 ‘우리’라는 그룹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다. 기름이 바닥나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깜박이기 시작하는 자동차 계기판같이 홀로 남은 인간의 뇌 안에선 ‘외로움’이란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어서 그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홀로 남으면 야생동물의 밥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위험하고 ‘우리’는 안전하다고.

외로움은 신체의 변화도 불러온다. 심장질환의 발생 원인 중 하나인 인터류킨-6 (IL-6) 수치가 높아지고 면역성이 떨어지며 혈압이 오른다. 뇌졸중의 위험성이 커지고, 의지력이 약해지며, 유전자 전사(DNA transcription)가 힘들어진다.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동상 걸린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듯, 어쩌면 ‘우리’라는 집단 안의 교감과 소통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홀로 남은 인간은 조용히 사라져 버리도록 프로그램돼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룹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벌 중 하나는 더 이상 ‘우리’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스트라시즘’을 통해 국가에 위험한 인물을 추방했다. 고향 피렌체에서 쫓겨난 단테는 이방인이 된 자신 존재의 불안함을 ‘베아트리체(Beatrice)’라는 영혼의 쉼터를 통해 치유하려 했다.

하지만 물론 공짜란 없다. ‘우리’가 제공하는 안전을 얻기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가족을 위해 가장으로서 희생해야 하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수도 있다. 내가 번 금쪽 같은 돈을 사회 평등을 위해 재분배해야 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법에 복종해야 할 수도 있다.

개미들은 절대 외로울 이유가 없다. ‘나’란 존재를 완벽하게 희생시키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개미들은 집단(우리)을 위한 희생을 최고의 행복으로 느끼는 것 같다.
지구에서 가장 외롭지 않은 이는 누구일까? ‘나’를 완벽하게 희생한, 아니 ‘나’란 존재 그 자체가 무의미한 개미들은 절대 외로울 이유가 없다. ‘우리’가 모든 ‘나’들을 이미 완벽하게 정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그렇기에 외친다. ‘나’는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영원하다고. 수십만 명의 당원들을 매년 뉘른베르크에 모아놓고 나치들은 게르만 민족 집단과 ‘천년 제국’의 숭배를 명령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일렬로 선 나치당원들, 그리고 집단의 힘을 상징하는 ‘소비에트 궁전’의 거대함에 기 죽어 푹 고개 숙이고 걸어다니는 공산당원들. 그들은 서서히 집단을 위한 희생을 최고의 행복으로 느끼는 이를테면 개미들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남기 위해 모두, 언제나, 어디서나 협동해야 했던 시대는 끝났다. 커진 뇌 덕분에 인간은 기술과 문명을 만들었다. 저장된 음식과 튼튼한 집은 집단에서 잠시 벗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적 여유를 가능하게 한다. ‘나’란 존재로 홀로 남아도 바로 소멸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만의 생각과 차별된 꿈을 가질 수 있다. ‘우리’에서 독립된 ‘나’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기계를 만들고, 우주와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홀로 남은 ‘나’의 뇌는 여전히 명령한다. 빨리 ‘우리’로 돌아가라고. ‘나’ 홀로는 위험하다고.

프랑스의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생각이란 뜻)에서 물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냐고? 바로 혼자만의 지루함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이 선물하는 홀로만의 지루함을 찬양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홀로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지루함은 ‘나’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생각은 결국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 의미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게임, 도박, 클럽, 스포츠, 막장 드라마, 오락의 역사는 지루함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가장 이상적인 인생을 ‘홀로 함께’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와 ‘우리’의 싸움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 나무로도, 개미로도 살 수 없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같이 다 함께 홀로 지구라는 탈출할 수 없는 우주선을 타고 오늘도 은하수를 돌고 있는 것이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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