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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麗·濟 분할 밀약’으로 신라 구했지만 중국화 길 터

중앙선데이 2014.01.12 01:58 357호 26면 지면보기
당(唐)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성의 한 성문(城門). 1371년 전 김춘추가 청병(請兵)외교를 위해 당으로 갔을 때 이 문 안의 성에 머물렀을 것이다. [사진 권태균]
서기 642년 8월 춘추의 딸 고타소의 죽음은 동아시아에 유례없는 대형 국제전쟁을 불렀고 결국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끝났다. 그 중심에 태종무열대왕(김춘추)이 있었다. 장녀의 죽음에 절치부심한 춘추는 그해 말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 평양성에서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던 춘추에게 고구려는 멸망시켜야 할 또 다른 적국이 됐다. 위와 옆에서 압박하는 적국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처했다. 비상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당나라에 대한 청병(請兵)외교였다.

다시 쓰는 고대사 ② 김춘추의 두 모습

신라는 643년 9월 사신을 당 태종에게 보냈다.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3년(643)조엔 “당 태종을 만난 신라 사신이 고구려와 백제가 이번 9월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하므로 하국(下國, 신라)의 사직은 틀림없이 보전되지 못할 것이므로 삼가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을 보내 대국에 말씀드려 일부 군사를 빌려 구원받기를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 태종이 “신라는 어떤 기이한 꾀를 써서 망하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가”라고 묻자 사신은 “저희 임금은 사세가 궁하고 계책이 전혀 없으므로 오직 급함을 대국(大國, 당나라)에 알려 사직(社稷)을 보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당 태종은 세 계책을 말하며 어느 것을 따르겠는가 하니, 사신은 “예”라 할 뿐 대답이 없어 황제는 그가 용렬해 군사를 청하고 급함을 알릴 만한 재간이 아닌 것을 탄식했다고 나온다. 당시 당은 세계를 지배한 글로벌 파워. 그러니 제국의 정점인 태종 앞에서 모든 이는 주눅 들어 꼼짝을 못한 것이다.

사실 당군을 끌어들여 고구려·백제를 정복한다는 구상은 실현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칠성우(1회 참조)들이 왕정을 장악한 진덕여왕 2년(648), 비상한 일이 벌어졌다. 왕위계승권자인 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는 사신이 된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다.

시안 근교의 당태종 무덤 소릉. 산 중간에 구멍을 뚫어 시신을 안치했다. [사진 권태균]
김춘추, 아들과 함께 對唐 청병외교 나서
당의 수도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에 간 춘추는 보통 사신과는 달리 당당했다. 여느 사신들처럼 태종 앞에서 “예, 예”만 하지 않았다. 춘추는 603년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용수의 아들. 왕궁에서 태어나 612년까지 살며 왕자(王者, 왕과 그 일족)의 생활을 익혔고, 언제인가 용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 태종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게다가 고구려 외교의 실패를 반추한 춘추는 준비를 했다. 당도 신라와의 동맹이 필요했을 것이란 계산도 했을 것이다. 고구려 원정 실패로 절치부심할 테니까.

‘준비된 대당(對唐)외교’에 나선 춘추의 모습이 『삼국사기』 5, 진덕여왕 2년(648)조에 그려진다. 태종은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포함한 사절단과 함께 온 춘추를 광록경 유형을 보내 교외에서 맞는다. 당 태종은 춘추의 영특하고 훌륭한 모습을 보고 후하게 대우했다. 춘추가 왕위계승권자라는 점을 파악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춘추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큰 제사)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했다. 당 태종은 허락하면서 손수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줬다. 왜 춘추는 ‘느긋하게’ 움직였을까.

당나라 성세(盛世)를 창시했다고 하는 당 태종의 흠 중 하나가 3년 전인 645년 고구려 정벌이었다. 당 태종은 직간(直諫)을 잘하던 위징(魏徵)을 기리며 “살아 있었다면 고구려 정벌이 잘못된 일이라 했을 것”이라며 한탄했다.(『당서』 97, 『위징』) 춘추는 당시 그런 태종의 심리와,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해 신라의 협조가 필요한 당의 사정을 면밀히 분석했을 것이다. 그런 초조함을 읽고 춘추는 당 태종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 계산이 먹힌 듯 당 태종은 춘추를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가.” 춘추는 무릎 꿇고 말했다.

“신의 본국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도 엎드려 천자의 조정을 섬겨오기를 여러 해 동안 해왔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제 나라를 침탈했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대거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해 당에 조공하는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대를 빌려 주시어 흉악을 잘라버리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 건너 직공(職貢)을 바치는 일을 다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 태종은 출병을 허락했다.

그때 태종이 춘추에게 한 약속이 『삼국사기』 진덕여왕 2년조에는 안 나오고 671년 7월 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의 첫머리에 나온다.

“선왕(춘추)께서 정관 22년(648)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文皇帝)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는데 ‘짐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여 매번 침략을 당해 편안할 때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고 옥백(玉帛)과 자녀들은 내게도 충분하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 주어 영원히 평안하게 하겠다’ 하시고 계책을 가르쳐주고 군사의 기일을 정해 주셨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은 태종이 죽은 후 태자 치(治) 즉 고종(高宗) 대에도 작동했다. 이 약속은 한국사의 방향을 결정한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었다.

문무왕, 당과 9년전쟁으로 영토 확장
춘추는 당 태종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러 조치를 했다. 당 태종은 춘추가 신성한 사람이라며 곁에서 숙위(군주를 호위하며 지킴)하라고 했지만 춘추는 이를 사양하는 대신 “신에겐 일곱 아들이 있는데 원컨대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게 해 달라” 했다. 당 태종은 문왕과 대감 1인을 숙위토록 했다.(『삼국유사』 1, 『태종춘추공』조) 태종은 춘추를 특진(特進, 제후 중 공적 있는 자에게 주는 명예칭호)으로 삼았다. 귀국 때는 3품 이상 신료들에게 송별 잔치를 베풀었다.

춘추는 그때 동시에 중국문명과의 고속도로를 뚫는다. 춘추는 신라인의 장복(章服, 옷)을 중국의 제도에 따르겠다고 했다. 당 태종은 진귀한 옷을 춘추와 그의 일행에게 주었다. 649년 정월 신라의 신료들은 중국 조정의 의관을 입었다. 664년 정월에는 문무왕의 명으로 여자들도 중국의 의복을 입는다. 중국 옷을 입는 것은 신라의 의식과 문화를 바꾸는 작업이었다. 이후 한국인의 겉모습은 확 달라졌다. 대신라(소위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들은 당나라 사람의 옷을 입고 있다.

춘추는 당의 유학(儒學)이 문화의 정통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오자마자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유교경전 강론을 참관하겠다고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라의 국학은 682년 설치되었지만, 그 안의 대사(大舍)라는 관직은 651년 설치되었다.(『삼국사기』 38, 『직관』 상) 한국식 유교 국가의 길은 춘추가 연 것이다. 650년엔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채택했다. 이런 중국화 정책을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당을 안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칠성우를 양신(良臣)으로 거느린 춘추의 리더십이 작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병과 문물 수용이 자주를 포기한 종속과는 엄연히 다른 것.

신라는 통일 이후 당군을 몰아낸다. 668년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고구려를 정복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신라가 군사 기일을 어겼으므로 계책을 써서 다스린다거나, 또 왜국(倭國)을 친다고 핑계를 대면서 실은 신라를 칠 것이라는 것이었다.(『삼국사기』 7, 문무왕 11년)

그러나 문무왕은 668~676년 당과 9년 전쟁을 치르며 신라의 토지를 패강(浿江, 청천강)까지로 넓혔다. 필자는 그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나, 안시성 성주와 성민들이 단합해 당 태종의 공격을 물리친 것보다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지만 신라의 국력도 당에 비교할 상대가 안 됐기 때문이다.

태종무열대왕(춘추)과 문무왕은 대당 청병외교로 국가의 최우선 과제인 생존을 실현했고 당나라의 신라 지배 야욕을 물리쳤다. 나아가 중국화 정책으로 정치·사회·문화 등 다양한 면에서 신라 왕국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신라의 현명한 두 국왕의 냉정한 판단이 나라를 살려내고 삼한통합을 이뤄 한국사의 물줄기를 고구려나 백제가 아니라 신라 중심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6·25전쟁 이후 정전(停戰) 상태가 계속되는 지금, 춘추의 청병외교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만 비난할 것인가. 오히려 남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켜내고 왕국을 국제화로 거듭나게 한 춘추의 판단에서 위기 관리의 역사적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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