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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칼럼] 전범에 대한 미국의 이중성

중앙선데이 2014.01.12 02:24 357호 30면 지면보기
“당신은 1933~45년 사이 어떤 방법으로든 독일 나치 및 그 동맹국과 관련된 박해에 관련된 적이 있습니까?”

한국인이 미국에 가려면 반드시 미국 정부로부터 받아야 하는 ‘전자여행허가서(ESTA)’에 나오는 질문이다.

“전염성 질병이나 신체·정신장애가 있느냐” “2회 이상 법률 위반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적이 있느냐”에 이은 세 번째 질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전염병·범죄경력과 함께 나치에 협조한 전력이 있다면 절대로 미국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얘기다.

머나먼 독일 땅에서 69년 전 사라진 나치에 협력한 한국인이 지금 이 땅에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이토록 철저하게 나치의 만행을 따지고 있다. 하지만 “미·독 관계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비난은 그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독일은 미국의 최우선 동맹국인데도 말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세계가 시끄럽다. 야스쿠니엔 미국이 ‘국제조약을 위반해 침략전쟁을 기획·시작·수행한 혐의(평화에 대한 죄)’로 처형한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미국 주도로 세워진 뉘른베르크 군사법원과 도쿄 군사법원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를 똑같은 죄목(평화에 대한 죄)과 똑같은 지위(A급 전범)로 평결해 처형했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것이 독일 총리가 헤르만 괴링이나 루돌프 헤스 같은 A급 전범들이 묻힌 곳을 참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유다.

나치 독일의 잘못엔 테라바이트급 메모리를 가졌으면서도 일본의 만행엔 기억상실증 환자로 돌변하는 미국 정부를,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이 나치의 만행을 수천, 수만 번 언급해도 미·독 관계가 손상되는 일은 없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과 이웃으로서 앞날을 함께 도모하는 건 별개란 인식이 양국 사이에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미·일 관계라고 왜 그렇게 될 수 없는가.

무조건 일본을 감싸는 미국 정부의 행동은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11만 미국인에 대한 모욕이다. 또 일본의 침략을 인류에 대한 범죄로 판결했던 군사법원에 대한 자기기만이다. 아베 총리가 참배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 중엔 미국을 ‘귀축(鬼畜:귀신과 짐승)’이라 부르고, 연단에 성조기를 깐 뒤 그 위에 올라가 연설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도 있다. 그가 지휘한 일본군은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들을 9일 내내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100㎞를 행군시켜 1만5000명을 숨지게 하는 등 글로 옮기기 힘든 만행을 저질렀다. “도조가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를 참배한 아베의 행동은 오사마 빈 라덴을 참배한 것과 같다”는 데니스 핼핀 존스홉킨스대 연구원의 일갈을 미국 정부는 귀담아들어야 한다.

한국은 결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원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열어 나갈 중요한 이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간 한·일 관계가 얼어붙은 건 망언·망동을 거듭해 온 일본에 책임이 있다. 그런 일본을 방조한 미국도 비난을 피하긴 힘들다.

앞으로도 미국이 일본의 망언·망동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면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아시아 우방들은 자의든 타의든 중국과 가까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악몽을 피하고 싶다면 일본에 타이를 건 타이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다소 마찰이 있을지라도 인류의 상식에 부합하는 리더십을 밀고 나간다면 일본의 개과천선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 전자여행허가서에 ‘나치 관련 여부’와 함께 ‘1910~45년 사이 제국주의 일본의 박해와 관련된 적이 있느냐’는 질문도 실리기를 바라는 건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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