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동연의 시대공감] 최고의 복수

중앙선데이 2014.01.12 02:30 357호 31면 지면보기
‘고전 완역판(完譯版) 읽기’는 뒤늦게 알게 된 즐거움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모두가 읽었으면 하지만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이라고 했다지만, 그 즐거움의 편린(片鱗)을 안 뒤에 나는 고전을 ‘읽는 나이대에 따라 느낌이 다른 책’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하곤 했다. 책은 그대로인데 읽는 이의 내면이 성장하면서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은 읽을 때마다 업그레이드된 감동을 준다. 그중 한 장면. 장 발장을 집요하게 쫓던 자베르 경위가 혁명군에 잠입했다가 포로가 되어 죽을 위기를 맞는데 장 발장은 자신이 처형하겠다고 하고는 풀어준다. 2000쪽이 넘는 완역판에서 불과 서너 쪽에 불과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의 소제목이 ‘장 발장의 복수’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대상을 용서하는 대목에 ‘복수’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지난달 남아공의 만델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나도 덩달아 바빠졌는데 국회 일정으로 한창 바쁜 중에 총리께서 조문 사절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기의 장례식’을 다녀온 총리로부터 여러 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역시 가장 감명 깊은 부분은 27년간의 비인간적인 감옥생활 후 투쟁과 응징이 아닌 화해와 용서를 통해 국민통합을 이룬 대목이다. 레 미제라블의 소제목을 원용하자면, 그런 화해와 용서가 만델라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복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해와 통합이란 주제에 새삼 관심을 갖는 이유는 증오와 투쟁의 사회적 비용 때문이다. “나라가 갈라지고 찢기면서 분열과 대결을 넘어 증오의 정치가 되고 있다.” 야당의 유력한 대권후보였던 분이 최근 한 말처럼 우리 사회가 가고 있다면 그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걱정이 돼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원인 중 하나로 꼽는 국가 시스템을 개혁할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라는 함정에 우리도 빠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다.

9·11 테러를 계기로 ‘증오’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이 시도되었다. 하버드대 글래서 교수의 ‘수요-공급’ 개념을 통한 풀이가 눈에 띄었다. 증오는 그런 감정을 고무시킴으로써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이익을 얻게 되는 집단에 의해 ‘공급’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정보를 왜곡하거나 일면만을 강조한 정보를 흘려 ‘증오의 수요자’들이 특정 집단에 극단적인 증오심을 갖게 한다. 그래서 증오를 확산시켜 편 가르기를 하는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집단은 누구인지, 증오가 어떻게 전파되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덫에 걸려있지는 않은지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우리 편인가를 따지게 되고, 갈등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세밑 철도파업이나 의료 민영화 논란에서 여실히 드러난 현상들이다. 물론 생산적인 분노의 표출은 사회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산적이지 않은 증오와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점, 그리고 그 비용은 국민 모두에게 부과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이런 비용을 줄이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무엇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자본의 확충이 필요하다. 최근 정부가 역점을 두어 추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원칙 없는 타협도 문제다. 그래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만든 규칙에 따라 경쟁하고 그 결과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증오의 증폭과 갈등의 확산에는 교육과 소득격차 문제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 또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한 남의 몫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고 공공선을 위한 합의도 어렵다. 이런 격차 완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적 노력과 함께 사회지도층의 솔선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 신뢰의 위기가 지도층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는 비판에 겸허히 행동으로 답해야 한다.

새해가 대립과 증오의 틀을 깨고 양보와 화합의 장으로 나아가는 원년이 됐으면 좋겠다.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는 ‘최고의 복수’가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인 위기요인들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레 미제라블』은 소설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남아공이 했다면 왜 우리가 못할까 싶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과 예산실장,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을 지냈다. 상고 졸업 후 은행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