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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분위기 실종된 러시아

중앙선데이 2014.01.12 02:33 357호 31면 지면보기
주한 외국인들이 고향을 가장 그리워하는 때는 아무래도 명절이다. 러시아의 12월은 새해 명절을 준비하느라 바쁜 때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이 새해 첫날이기 때문이다. 선물도 사고 친구들과 만나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서로 행운을 빌어준다. 새해 전야 파티 식탁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다. 저녁을 먹고는 별자리점으로 새해 운세를 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새하얀 눈, 초콜릿·사탕, 여기에다 제주도산 감귤(러시아에서 인기가 높다) 등의 향기와 더불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다. ‘즐거운 소란’이 외국에 살면서 가장 그리웠다. 몇 해 동안이나 새해를 외국에서 보낸 나는 지난해 12월 러시아로 돌아가 열흘의 휴가를 보냈다. 그런데 고향 러시아에선 예전 같은 새해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여러 행사에서 만난 러시아인 친구들 역시 그렇게 말했다. 사실 달라진 건 많지 않았다. 러시아의 새해 풍경에서 이젠 빠질 수 없는 감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귤의 향기가 예전처럼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고향을 떠난 지 오래돼 러시아만의 새해 명절 느낌을 잊어버렸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다. 익숙했던 명절 풍경은 낯선 것이 돼버렸다.

왜 그럴까. 예전 같은 새해 전날의 즐겁고 소란스러운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들은 일상의 여러가지 문제에 파묻혀 있었다. 새해 명절 자체를 골칫거리로 여기는 분위기도 느껴졌다. 전반적 사회 분위기도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경기도 침체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지난 한 해, 러시아 경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유가는 높아졌고 산업 성장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많은 러시아인은 새해에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걱정했고, 연금에 의지해 생활하는 노인들은 지속적으로 인상되는 공공서비스 요금과 식료품 가격을 걱정했다. 새 연금제도에 대해서도 불안해했다. 자동차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 도입된다는 자동차 보유세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날씨마저 새해 분위기를 망치는 데 일조했다. 날씨가 너무 따뜻한 나머지 러시아의 새해 명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모스크바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영상의 날씨가 이어졌다. 전통적 겨울스포츠인 스키나 스케이트를 탄다는 건 이상한 일이 돼버린 이상한 새해 명절이었다.

연말 아침 뉴스도 예전과는 달리 좋은 소식이 별로 없었다. 이르쿠츠크 비행기 추락 사고부터 공금 횡령에 대한 조사가 이어진다는 등의 흉흉한 뉴스만 이어졌다. 마치 새해 명절이 사라진 듯했고, 내가 지금 러시아에 있는 게 맞나 싶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은 약 2주간 주어지는 새해 휴가를 맞아 다른 휴양지로 떠나는 러시아인들로 붐볐다. 러시아인의 새해 맞이 방식도 변화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예전엔 가족과 집에서 보내는 게 러시아의 명절 풍경이었다면, 이젠 관광지를 찾아 사방팔방으로 떠나는 것이다. 다른 휴가와 비슷해지고 있다. 아마도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질 중심, 개인 중심의 사회가 된 러시아에서 명절은 과거의 매력을 잃었다. 중요한 건 새로운 매력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현재 러시아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치 겨울올림픽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현실의 복잡다단한 문제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물론 올림픽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현재 러시아인의 삶 속에 명절 풍경이 차지할 수 있는 여유는 없어 보였다.



이리나 코르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국제경제대학원을 2009년 졸업했다. 2011년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의 HK연구교수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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