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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카자흐 소녀, 새해 한국서 희망을 선물받다

중앙일보 2014.01.02 00:38 종합 12면 지면보기
화상을 입기 전 살리닷의 모습.
2012년 12월 31일 오후 카자흐스탄 남부 지역인 타라즈주 잠불에 사는 당시 일곱 살이었던 소녀 살리닷은 평소처럼 집 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눈발이 날리며 날씨가 추워지자 살리닷은 보일러를 켜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러시아식 가스보일러인 페치카의 밸브를 열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보일러가 폭발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경유통으로 옮겨붙었다. 집 밖에서 눈을 치우고 있던 아버지 쿠아느스벡(36)이 딸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왔지만 이미 아이의 몸에 불길이 번져 있었다.


화재로 턱·가슴 붙어버린 살리닷
고대병원·교회 도움 10차례 수술
얼굴 모습 되찾자 "고맙습니다"

 부녀는 사고 직후 지역의 화상 전문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세 차례의 응급수술 끝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살리닷은 상반신에 3도 화상을 입었다. 턱과 가슴이 붙어버렸고 양쪽 손가락은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입과 귀도 심하게 일그러졌다. 음악 교사를 꿈꾸던 살리닷은 사고 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예전에는 ‘꾀꼬리 같다’고 칭찬하던 친구들이 ‘괴물 같다’고 놀릴까 두려워 외출도 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12일 첼리스트 성승한씨가 카자흐스탄 소녀 살리닷을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만났다. 성씨는 화상으로 10차례 수술을 받는 살리닷을 응원하기 위해 병실을 방문해 작은 연주회를 펼쳤다. [사진 고대병원]
 지난해 8월 절망에 빠져 있던 부녀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단기 의료봉사차 타라즈를 방문한 고려대 이식혈관외과 정철웅(41) 교수가 소녀의 사연을 듣게 됐다. 정 교수는 자신이 다니던 서울교회의 도움을 받아 모금활동을 벌였고 부녀가 한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항공권을 마련해 줬다. 희망을 안고 한국을 찾은 가난한 농부 가족을 돕기 위해 여러 사람이 나섰다. 고려대 안암병원 성형외과팀은 10월부터 지난달까지 열 차례의 수술을 진행했다. 특히 첫 수술은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대수술이었다. 근육이 엉겨붙어 전신마취에 필수적인 기도 삽관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의료진은 우선 목 부분의 수축된 피부를 일일이 떼어내 편 후 기도 삽관에 성공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턱과 가슴이 분리되고, 입과 귀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쿠아느스벡은 “딸이 살아난 것도 기적인데 한국 의료진 덕분에 더 큰 기적을 경험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7000만원의 치료비도 모금으로 마련됐다. 서울교회 측은 “종교의 차이를 떠나 당연히 도울 일”이라며 자선음악회를 열어 4000만원을 모금했다. 나머지 3000만원은 고대 병원이 지원했다. 자선음악회 무대에 섰던 첼리스트 성승한(40)씨는 살리닷의 병실도 방문했다. 성씨가 동요 ‘작은별’을 연주하자 살리닷은 카자흐스탄 동요로 응답했다. 성씨는 “살리닷이란 이름처럼 살려는 의지가 강하고 성격도 밝은 아이”라고 말했다.



사고 1년 만인 지난달 31일 살리닷은 한국어로 눈·코·입·귀를 가리키며 의료진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웃는 얼굴로 퇴원했다. 피부와 근육이 다시 붙지 않도록 하고 근육량을 키우는 게 남은 과제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적을 경험한 살리닷 부녀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이들은 오는 17일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다.



민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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