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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슨 퍼스트’ 자세로 유머 섞고 쌍방향 소통하라

중앙선데이 2013.12.29 00:10 355호 11면 지면보기
고(故) 헬렌 토머스 기자가 2009년 2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삿대질하듯 손을 내민 채 질문을 퍼붓고 있다. 토머스는 “어려운 질문을 던질 때 민주주의는 잘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의 질문세례에 진땀을 뺀 역대 대통령들도 그를 존중했다. 작은 사진은 같은 해 8월 4일 토머스에게 백악관 기자실에서 깜짝 생일 파티를 열어준 오바마. [AP]
지난 20일 백악관 기자실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들어섰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일정으로 기자회견을 택한 그는 100여 명의 펜·카메라 기자의 질문공세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자, 제이(대변인 이름)가 내게 ‘착한 기자 나쁜 기자’ 명단을 줬습니다. 첫 번째로 AP의 줄리 페이스 기자부터 시작하죠. 줄리는 착하길 바랍니다.”

대통령 신년회견 앞두고 살펴본 기자회견의 기술

 송곳 질문을 하겠다며 벼르던 기자들은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채 잦아들기 전 시작된 페이스 기자의 질문은 ‘착하지’ 않았다. “올해 초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히신 목표들 중 달성하신 게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군요. 지지율도 낮아졌고요. 이렇게 묻겠습니다. 올해가 대통령으로서 최악의 해였나요?” 웃음을 터뜨린 오바마 대통령은 “글쎄, 줄리, 난 그렇게 보지 않아요. 좋을 때도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미국 국민들이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답변이 마음에 안 든 페이스는 틈을 주지 않고 바로 후속 질문을 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건강보험 개혁부터 외교 문제까지, (미국) 국민들이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계시느냐는 거예요.” 오바마 대통령도 바로 받아쳤다. “하지만 줄리, 내 지지율은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는걸요. (2초간 침묵) 내 지지율은 앞으로도 등락을 계속할 겁니다.”

 1시간 계속된 기자회견은 설전(舌戰)의 현장이었다. 기자들은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말을 잘랐고 대통령도 국가안보국(NSA) 문제 등에 있어선 “난 아무리 그래도 이 나라 국가 수반으로서 NSA에 고마움을 표한다”고 당당히 맞섰다. 이 전쟁터에선 대통령과 기자 모두 승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연두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1972년 1월 11일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 섰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서울 시내 명동 뒷골목에서 시골 소년이 9년간 구두닦이를 해서 저축한 돈으로 백수십만원의 저금통장을 가졌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자발적으로 전개한 생활, 건전한 운동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운동에 발맞춰서 우리 국민 각자에 자각 또는 자숙해서 이뤄지는 국가 시책과 시국에 대한 협동정신 이런 것이 (중요합니다).”

 노무현정부에서 언론 담당을 맡았던 유민영 전 청와대 춘추관장은 “우리나라 신년 기자회견의 효시가 박 전 대통령”이라며 “언론 환경을 통제했다는 특징이 있긴 하지만 ‘연두 기자회견’이라는 이름으로의 전통은 박 전 대통령 시절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달 첫 신년 기자회견을 연다. 박 대통령은 지난 23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매년 새해가 되면 대통령의 신년 구상과 어젠다, 정책 방향 등에 대해 대통령이 국민 앞에 밝혀 오곤 했다”며 참모진에게 어젠다와 내용을 잘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한 기자회견을 한 적이 없기에 신년 기자회견 실시 자체가 뉴스가 됐다.

 그러나 백악관 출입을 반세기 넘게 하며 존 F 케네디부터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지근거리에서 취재한 고(故) 헬렌 토머스 기자가 보면 ‘참 이상한 뉴스’일 수 있다. 미국에선 신년 기자회견을 안 하면 뉴스가 되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의 명분을 설명하는 부시 전 대통령의 말을 자르며 “그런 말은 됐고요. 그래서 이 전쟁을 석유 때문에 일으킨 게 맞는 거예요?”라고 물었던 토머스 기자다. 그는 “어려운(tough) 질문을 (높은 이에게) 던질 수 있는 사회가 민주사회”라고 말하곤 했다.

21세기 대통령에겐 ‘소통의 철학’ 필수
기자회견은 양측 모두에게 긴장된 전쟁터다. 매의 눈을 한 수십 명의 기자들은 전략적 이유로 진실을 100% 털어놓을 수 없는 대통령을 상대로 스무고개를 벌인다. 카메라는 작은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말 실수는 바로 신문의 1면 톱, 방송의 9시 메인 뉴스가 된다.

 그래도 국민과의 소통은 대통령의 의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고, 이왕 할 것이라면 잘해야 한다. 현재 홍보전문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유민영 전 춘추관장은 “5000만 국민 중에서 단어당 말의 가치가 가장 높은 사람은 대통령”이라며 “지금과 같은 소통의 시대에서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선택 아닌 필수”라고 설명했다. 소통의 방식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처럼 즉각적이고 다양해진 지금, 소통을 하지 않으면 불통의 프레임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소통을 많이 한다는 건 리스크 역시 커진다는 점이다. 유 전 춘추관장은 “수사학에선 전략적으로 합의되고 준비된 언어를 사용해야 훌륭한 소통법이라고 하지만 현대 소통의 사회에서 이런 소통법은, 특히 기자회견과 같은 설전의 장소에선 불가능하다”며 “21세기 대통령들에게 소통의 철학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 소통의 철학의 핵심엔 ‘반응’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트위터의 리트윗,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처럼, 지금의 대중은 ‘리액션(reaction·반응)’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다변의 리스크’, 즉 소통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메시지가 왜곡될 가능성이 문제였지만 박 대통령은 그 반대”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리액션의 첫걸음은 ‘듣는 것’이다. ‘리슨 퍼스트(Listen first)’다.

 “박 대통령의 경우 불통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한 듯 보인다. 국민의 이야기, 약자의 스토리를 듣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는 방식의 신년 기자회견이 좋을 것 같다. 한 정당이나 세력·이념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심는 기회로 삼아 과거 프레임에서 벗어나 미래 전략 의제로 전환할 중차대한 시점에 와 있다.”(유민영)

 외교부 제2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쌍방향성’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기자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구현되어야 하며, 딱딱한 회견이 아니라 일상적 담화도 녹아 있는 밀착형 기자회견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다.

 김 교수는 또 ^중학교 2학년 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메시지를 두 번 이상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여유로운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농담을 최소한 2~3가지 준비해 갈 것을 제언했다. 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코소보 공습 결과를 설명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2003년 이라크 파병 결정을 발표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기자회견을 역대 명회견으로 꼽은 김 교수는 “몇 개의 기자회견 영상을 미리 보고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참모진 역시 공부를 많이 해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기자회견은 대통령뿐 아니라 참모진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존재가 시험대에 서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기자도 예의 갖춰 알맹이 있는 질문 해야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통령만 열심히 해선 안 된다. 질문할 권리를 가진 기자들은 그 권리를 잘 행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기자의 질은 질문의 수준과 태도로 평가된다. 지난 20일 오바마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도 송곳 질문을 퍼붓던 기자들도 “아, 대통령님(Mr. President), 메리 크리스마스예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여유와 농담을 잃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저기, 질문이 너무 긴데요”라고 농담하면 “아까 ○○ 기자보다는 짧은 걸요”라며 웃으며 응수했다.

 올해 초까지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을 지낸 스티브 허먼 미국의소리(VOA) 동남아지국장은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한·일 기자단의 독특한 문화가 기자회견의 정형성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에서 10년 넘게 특파원 생활을 해 일본어에도 능통한 허먼 지국장은 “한·일 기자들은 대통령 기자회견에선 늑대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공격적 질문을 하면 대통령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뿐 아니라 ‘기자단’이라는 폐쇄된 시스템에서 미리 조율된 질문만을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몸을 사리는 기자들 때문에 기자회견 문화가 미국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재미동포로 서울에서 2년간 근무했던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INYT)의 전 에디터인 세이 정은 e메일에서 “미국에선 ‘대언론 관계가 좋은 대통령이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모든 미 대통령들이 언론과 최고의 친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국 대통령이라면 언론을 소중히 다루는 게 업무의 주요 일부라는 사실을 당연시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첫 4년간 78회로 한 달에 1.6회씩 기자회견을 했지만 역대 미 대통령의 월 2회 기록에 못 미치기 때문에 “기자회견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이 신년 기자회견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다. 신년 기자회견은 대통령이 그해의 어젠다를 제시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여느 기자회견과도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유 전 춘추관장은 “잘 활용하면 국면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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