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노소프 “발해 수도 상경성은 ‘만주의 폼페이’ 될 것”

중앙선데이 2013.12.29 01:23 355호 26면 지면보기
1930년대 하얼빈의 고고학과 자연과학자들. 하단 왼쪽 끝은 신석기시대를 연구한 루카시킨, 하단 오른쪽 둘째가 포노소프. 상단 왼쪽 둘째는 말갈문화를 발견한 젤레즈냐코프. [사진 강인욱 교수]
1931년 9월 10일. 일본 관동군이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근처에서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일주일 전. 하얼빈발 기차에 몸을 싣고 발해 유적 조사를 떠나는 러시아 학자들이 있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후원금을 모아 어렵게 조사단을 꾸렸다. 그들은 소련이 여권 발급을 거부한 ‘백군파(볼셰비키혁명 때 반혁명 입장에 섰던 부르주아 온건파)’였다. 당시 발해 수도 상경성(上京城) 일대는 비적들이 횡행하는 곳이라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주의 역사를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장정을 감행했다.

30년대 발해 연구한 러시아 고고학자들

포노소포 발굴단이 작성한 상경성 평면도.
발해 수도 상경성에 대한 최초의 고고학적 조사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12일간 상경성 궁전지의 중심부를 조사했다. 조사기록에는 외성북문, 오봉루, 중궁의 서북과 동북벽 모서리에서 각루, 제1궁전, 제2궁전, 제3궁전 등이 표시됐다. 우물터도 기록됐다. 또한 동벽과 서벽의 중간에도 문이 있는 것을 찾아냈다. 동벽의 문터 바로 밑에도 문터 같은 것이 있지만 파괴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상당히 정확한 묘사다. 이어 10월 25일까지는 무단장(牡丹江)과 경박호 일대의 발해유역을 조사했다. 현재의 애하참-영고탑(현재의 영안시)-동경성-경박호-남호두-이참-해림참에 대한 45일간 조사는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이 발굴을 이끈 대표자가 러시아 고고학자 포노소프(V. V. Ponosov)였다. 그는 1899년 우파시에서 태어나 1922년 하얼빈으로 건너온 뒤 40여 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했다. 당시 하얼빈에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이어받은 당대 최첨단의 고고학자와 생물학자, 지질학자가 많았다. 시민혁명의 여파로 제정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50년 넘게 하얼빈에 거주하며 고고학연구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만주의 역사를 발굴하고 조사했다.

포노소프 발굴단의 조사는 상당히 정확한 유구 평면도와 트렌치를 통한 유구 확인, 출토 유물의 박물관 전시 등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수준 높은 연구였다. 포노소프의 발굴은 상경성이 발해 고고학을 대표하는 유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학계가 별다른 검토 없이 쓰는 ‘발해문화’또는 ‘발해고고’라는 개념은 사실상 포노소프를 중심으로 한 고고학자들이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포노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망명자들의 불행한 삶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이용되고 폄하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는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이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동아고고학회’의 등장이 그 단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가 공고히 되자 곧바로 만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1925년에는 그들의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아고고학회를 발족했다. 그 비용은 중국이 지불한 ‘의화단 사건 보상금’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앞장선 동아고고학회는 러시아인의 발굴 자료에 기반, 발해 발굴을 시작한다.

“만몽(滿蒙)은 한민족의 영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관계가 밀접하다.”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그들은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했다. 동아고고학회는 설립 초기부터 발해 상경성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지켜보고만 있다가 만주국이 성립되자마자 곧바로 발굴단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발해고고학은 만주를 일본의 역사에 연결시키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조차 발해 발굴의 효시가 하얼빈의 러시아 발굴단이 아니라 동아고고학회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비운의 학자 포노소프는 동아고고학회가 발해 상경성의 발굴을 독점한 이후 더 이상 발해 연구를 하지 못했다. 포노소프는 일찍이 “상경성은 ‘만주의 폼페이’가 될 것”이라고 중대성을 인식했다. 연차 발굴을 기획하고, 이 ‘만주의 폼페이’가 만주 역사연구에 서광을 비출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이름도 잊혀졌다.

1940년대를 전후해 지역 정세가 불안해지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하얼빈의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포노소프는 ‘조사한 자료를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없다’며 중국에 잔류했다. 그리고 1957~61년 중국의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수십 년간에 걸쳐 조사한 유적들을 정리하고 중국인 학자들을 양성한 후에 호주로 이민 갔다. 그가 조사하고 전시한 유물들은 하얼빈시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건물은 그가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호주에선 브리즈번의 퀸즐랜드대 인류학 박물관에 근무하며 호주의 고고학에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한 뒤 1975년 사망했다.

연해주 일대에 있었던 발해는 단순한 역사 속의 나라가 아니다. 발해는 한·중·일 역사분쟁의 아이콘이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있었던 발해, 동예, 옥저 등의 고대 국가들은 우리 한국과 밀접한 문화적 교류를 해왔다. 하지만 중국, 러시아, 북한으로 분리되면서 우리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한 간도 지역은 발해의 옛 땅일뿐더러 19세기 말부터 한국인(고려인)이 정착하고 일제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벌인 거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더 잘 기억해야 한다. 포노소프가 생각한 ‘만주의 폼페이’는 대륙 침략의 구실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고대문명의 빛으로서의 발해다. 발해는 주변 여러 지역과 교류하며 발전했다. 발해 연구 또한 주변국과의 갈등이 아니라 동북아시아를 아우르는 국제적인 연구의 장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포노소프(1899~1975) 러시아 우파시 출생. 키예프 상업학교(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키예프와 우랄산맥 지역 고고학 조사 수행. 1922년 하얼빈 이주, 만주 동성(東城)연구회 핵심 멤버. 1937년 만주국 대륙연구소 소속 박물관 실장. 1957년 중국 헤이룽장성 박물관 연구원.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