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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인간의 향기

중앙선데이 2013.12.29 01:31 355호 27면 지면보기
언제부턴가 삶이 허허할 땐 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은 붓을 잡고 의미 있는 그림 전시도 하고 또 남의 그림을 보며 축하도 해준다. 인간의 이러한 일기(逸氣)가 문화 역사에서 문명사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10여 년 전에는 충북 연풍에 사시는 연제식 신부님과 그림 전시회를 했었다. 소탈하고 유머가 풍부하며 관조적 말씀도 재미나게 하시는 분으로, 어쩌다 한번 뵙게 되면 세상 살아가는 얘기에 그날 하루가 즐겁다. 초지일관 산과 계곡의 풍경을 화폭에 담으면서도 명상 중인 본인과 늘 옆을 따라다니는 개 한 마리를 그린 그림도 선보일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분이다.

얼마 전엔 천안 성거산 순교성지에 계시는 정지풍 신부님을 만나게 됐다. 추상화를 그리시는 분으로 부모님 뜻에 따라 의대를 다니다 ‘이게 내 삶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어느 날 가출하다시피 집을 나와 가톨릭신학대학에서 신부 수업을 마친 뒤 서른일곱 살에야 서품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신부님이 내게 들려준 일화다. 보좌 신부 기간을 마치고 드디어 정식 신부가 돼 충청도 시골 본당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해 추운 설날 마을 외딴곳에 홀로 살고 계신 나이 많은 할머니가 생각났다. 자식도, 남편도 없는 외로운 분이 명절에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싶어 ‘오늘은 할머니의 아들이 돼보자’고 마음먹고 어스름한 저녁 성당을 나서 논길과 산길을 걸어 마을 외딴집을 찾아갔더란다.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하니 할머니가 “아니, 우리 신부님이 여기를 어디라고 오셨어요”라며 맨발로 마당을 나와 신부님을 얼싸안고는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할머니가 손수 차린 저녁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늦은 밤이 돼서야 집을 나서게 됐다.

그런데 하필 그날 소리 없이 눈이 내리더니 집을 나설 때는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길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눈에 한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길을 무려 세 시간 동안 산길을 넘어 새벽 3시가 돼서야 성당에 도착했다. 그때 신부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맛으로 신부 하지.” 할머니 생각에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미사를 드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며칠 전 경북 김천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는 남자 후배 교무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소.” “응, 날도 추운데 어찌 사나 싶어서. 요즘 잘 살지?” “네, 그런데 요즘 좀 바빠요.”

사연인 즉 얼마 전 지리산 운봉에 계신 85세 어머니가 찾아오셨단다. 날도 추운 겨울, 결혼도 안 하고 혼자 교화를 하는 막둥이 아들이 걱정돼 먼 길을 마다 않고 오신 거였다. 50이 넘은 아들도 부모 마음에는 한없이 부족하고 어설픈 자식일 뿐이었다. 며칠을 지내시던 어머니는 심심하셨던지 평소 잘 짓던 겨울 감기 특효약을 만들어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셨다. 생강을 깨끗이 물에 씻고 말린 뒤 즙을 내고는 꿀을 적당히 넣는 게 비법이었다. 이를 작은 병에 담아 몇몇 이웃에게 나눠줬는데, 맛을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또 만들어달라는 바람에 요즘 어머니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단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누구를 닮으면 되는지, 멘토는 누구로 하면 좋은지 늘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눈 시린 한겨울 매화꽃도 향기를 내뿜는데 사람은 더 그윽한 향을 내뿜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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