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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페스트 대재앙 … 만주지역 4만 명 떼죽음

중앙선데이 2013.12.29 01:46 355호 29면 지면보기
1911년 1월 청나라 정부는 방역총국(防疫總局)을 설치하고 우롄더(앞줄 왼쪽 첫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사진 김명호]
1907년 이른 봄, 랴오닝(遼寧)성 뉘장(牛莊)에 페스트가 창궐했다. 직례총독과 북양대신을 겸하던 위안스카이는 해외에 있는 젊은 의사들의 명단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인이건 화교건 가리지 마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54>

위안스카이는 방안에 틀어박혀 100여 명의 경력을 살폈다. 우롄더(吳連德·오연덕)의 이름 앞에 방점을 찍었다. 29세, 말레이시아의 페낭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하는 열대의학과 전염병, 방역 전문가였다. 외교관 출신 스자오지(施肇基·시조기)가 토를 달았다. “제가 아는 청년입니다. 유럽에 있을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영국 왕실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준재이긴 하지만 고집이 워낙 셉니다. 주장을 굽히기 싫어해서 충돌이 우려됩니다. 중국에는 열대의학이나 방역 전문가가 필요 없습니다”

얼굴이 한 차례 일그러진 위안스카이는 면박을 줬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굽히지 않는 건 고집이 아니다. 쓸데없이 트집 잡지 마라.” 성격이 불같았던 위안스카이는 그래도 화가 안 풀렸던지 “너야말로 내 비위나 맞추며 나를 갖고 노는 놈이다. 그간 감언이설로 나를 얼마나 우롱했을지 이제야 알겠다”며 찻잔을 내동댕이 쳤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꺼져라.” 역시 천하의 위안스카이다웠다.

런던에서 열린 국제 아편금지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우롄더는 “連德仁弟大人閣下”로 시작되는 위안스카이의 간곡한 편지를 읽고 말레이시아를 떠났다. 조상대대로 광둥(廣東)에 살았다고 하지만 중국은 처음이었다.

우롄더가 중국을 향하던 중, 위안스카이는 군기대신(軍機大臣)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거지 톈진(天津)을 떠나면서 육군군의학당(陸軍軍醫學堂)에 우롄더의 자리를 마련했다. 부하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내가 없더라도 우롄더를 각별히 돌봐라.”

베이징의 위안스카이가 우롄더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다. “중국어가 익숙하지 않다고 들었다. 모국어라 빨리 배울 수 있으니 선생을 구해라. 사람은 많이 사귈수록 좋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쓰레기 같은 것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 런던과 베를린에 가서 군사의학을 살피도록 해라.” 우롄더는 시키는 대로 했다.

1908년 12월, 베를린 체류 중이던 우롄더는 위안스카이의 실각소식을 듣자 귀국했다. 위안스카이를 찾아갔다가 “하던 공부나 계속하지 왜 돌아왔느냐”며 욕만 바가지로 먹고 톈진으로 돌아왔다. 화낸 게 미안했던지 위안스카이는 인편에 먹을 것과 편지를 보냈다. “나는 툭하면 화부터 내는 단점이 있다. 오래된 성격이라 평생 못 고칠 것 같다. 고전을 열심히 읽어라. 말 같지 않은 소리도 있지만 배울 게 많다.”

1910년 여름, 시베리아에 페스트 환자가 발생했다. 거주지가 분산된 지역이다 보니 감염자는 많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증세가 수상한 중국인들을 추방했다. 병균을 몸에 안고 철길을 따라 조국으로 향하던 사람들은 거의 중도에 목숨을 잃었다.

10월 19일, 두 명의 노동자가 국경을 넘었다. 보름 전, 이들이 머물던 간이 숙소에서 중국인 7명이 급사했다. 기겁한 러시아인들은 숙소와 죽은 노동자들의 짐을 불사르고 나머지 중국인들을 국경 밖으로 내몰았다.

만주리(滿洲里)의 초라한 여관방에 몸을 푼 두 사람은 6일 후 세상을 떠났다. 투숙객들의 사망이 잇달았다. 한결같이 고열에 시달리다 피를 토했다. 시신은 검붉은 장밋빛 같았다. 작은 국경도시에서 발생한 사건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동북 3성에 페스트가 몰아 닥칠 징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대청제국(大淸帝國)의 마지막 겨울은 참혹했다. 신해혁명 발발 10개월 전,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고약한 전염병이 제국의 발상지 만주를 덮쳤다. 북만주의 중심도시 하얼빈은 시베리아와 만주를 관통하는 중동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철도공사가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얼빈 북부의 푸자뎬(傅家店)은 인구 2만5000명의 주거지로 둔갑했다. 방값이 저렴하고 사람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전형적인 빈민굴, 흉악한 병균이 침투하기에 딱 이었다.

푸자뎬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하얼빈 전역은 물론이고 지린(吉林)과 헤이룽장(黑龍江)까지 확산됐다. 사망자가 4만 명에 달하자 만병통치로 알려진 아편 값이 폭등했다. 잡귀를 쫓아야 한다며 폭죽소리가 동북 3성을 휘감았다. 관리들은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안심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명은 하늘이 주는 것, 천명에 따라야 한다.”

러시아와 일본은 교민 보호를 이유로 청나라 정부에 방역권을 요구했다. 당시 하얼빈에는 러시아와 일본인이 많았다. 청나라 조정도 방역에 적합한 인물을 물색했다. 훗날 세계 최고의 방역 전문가로 청사에 남을 우롄더가 중국에 와 있는 줄은 알 턱이 없었다.

몇 년 전, 위안스카이에게 말 한 번 잘못했다가 곤욕은 치른 스자오지는 엉터리가 아니었다. 방역 주권론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일본과 러시아가 중국 땅에 들어와 독자적으로 방역을 실시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부당하다. 동북 3성의 주권을 내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중국 땅에서 발생한 질병이다. 우리 손으로 처리함이 마땅하다”며 우롄더를 천거했다. 조정은 스자오지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우롄더는 스자오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2월 22일 새벽, 역에 나온 스자오지에게 “페스트는 악성 전염병이다. 치료약이 없다.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북행길에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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