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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규 칼럼] 푸틴의 4시간 소통 축제

중앙선데이 2013.12.29 01:53 355호 30면 지면보기
10여 일 전 모스크바 지하철에서의 일이다. 60대 남성이 이어폰을 끼고 내 옆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 가서는 다짜고짜 “양보해”라고 삿대질을 한다. “양보해 주세요”도 아니다. 그래도 청년은 훌쩍 일어났다.

문득 이 동네 예절 수준이 궁금해졌다. 19년 전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둘러보니 나이 든 이는 대개 앉고 젊은이들은 서 있다. 앉은 이는 책·신문을 읽거나 눈을 감고 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다. 하긴 바퀴 소음이 커서 떠들기도 어렵다. “노약자·임산부·장애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시라”는 방송이 계속된다. 정치 시즌이 아니라 그런지 거리도 조용하다. 연말인데도 알코올의 분위기가 없고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가 면허 취소에 벌금 폭탄을 맞기 때문에 음주운전도 없단다.

오랜만에 5일 정도 두서없이 본 이런 광경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한국 젊은이들, 휴대전화에 몰두하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 겁 없이 음주운전에 도전하는 한국인, 시내를 장악한 시위대의 날 선 함성과 오버랩된다. 오래도록 보수적인 러시아 사회는 빠르게 분방해지는 우리와는 참 다르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다름’도 눈에 띈다. 지난 19일 러시아 TV엔 종일 푸틴 대통령이 나타났다. 4시간5분짜리 대형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내신기자 1000명, 외신기자 300명이 수십 개 질문을 던졌다. 외부 시각으로 볼 때 큰 주제는 없었던 듯하다. 참석한 기자 가운데 많은 수가 지방에서 왔고 그들은 지역 현안을 물었기 때문에 회견의 날카로움을 기대하긴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런 대형 소통 행사가 올해만 벌써 두 번째다. 지난 4월 25일엔 4시간47분짜리 ‘취임 1년, 푸틴과의 대화’가 있었다. 첫 질문으로 “지방에는 월급을 제대로 못 받는 사람이 많다”는 볼멘소리가 나오자 푸틴은 “나는 돈을 보내라고 지시했는데…”라며 체면을 구겼다. “집권 1년 성과가 뭐냐” “무능한 장관은 왜 놔두느냐”고 거푸 따지는 질문에 푸틴은 “취임 (5월 7일) 1년도 안 됐다. 믿고 기다려 달라”고 땀을 흘렸다. 보좌관의 도움 없이 통계를 말하고, 필요할 땐 더듬거리거나 “말하기 싫은데…”라며 피해가기도 했다.

이런 행사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반응은 다양하다. “크렘린과 국민의 거리를 좁힌다”는 환영도 있고 “속 보이는 자기 선전”이란 혹평도 있다. 푸틴을 ‘독재자’로 보면 전파 낭비, 국민 호도일 것이다. 그런데 독재자라면 스탈린처럼, 김정일·김정은처럼 하면 되지 굳이 생방송의 부담을 질 필요가 있을까. 내겐 “푸틴이 국민과의 대화를 즐긴다”고 하는 일부 러시아 언론인의 의견이 맞아 보인다. 그래서 대통령 때인 2000~2007년 일곱 번, 총리 때인 2008년 수시간씩 대형 소통 행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 소통의 장에서 푸틴이 말과 제스처를 통해 ‘온몸으로 말한’ 정치와 정책의 논리는 러시아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면서 동시에 지지 이유를 깨닫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보수적인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보수파 대장 푸틴 지키기’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려 소통을 말하면 어떨까.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소통에 목말라 한다. 지난 1년 일은 화산처럼 터지는데 청와대 참모의 입으로 전해지는 것 외에 대통령의 육성은 너무 귀하다.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저런지 진솔하게 설명하면 국민이 이를 헤아려 듣고 푸틴처럼 정치적 자산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에선 미국 아닌 러시아를 ‘배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도 이번엔 청와대가 푸틴의 소통 방식을 눈여겨봤으면 한다. 그래서 신년 기자회견도 ‘할까 말까’가 아니라 ‘얼마나 화끈하게 할까’로 방향이 잡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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