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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vs 주후실언

중앙선데이 2013.12.29 02:00 355호 31면 지면보기
연말인데 한국은 왜 이렇게 분위기가 나지 않느냐는 미국인 친구의 말에 “한국 생활을 10년은 해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의 연말은 온 동네에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중국의 연말은 거리마다 내걸린 붉은 초롱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그러나 한국의 연말은 송년회의 술잔과 덕담 한마디의 뜨거운 정 속에서 나온다.

한국의 연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술 이야기다. 중국도 한국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만 한국과는 좀 다른 모습이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을 때 중국인은 “언제 식사 같이 하자”고 한다. 한국인은 “언제 술 한잔 하자”고 한다. 중국인도 술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술자리에서도 전쟁터의 병사처럼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술자리를 통해 친해지기도 하지만 술자리에서 상대방의 성격을 판단하고 약점을 찾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처럼 ‘취중진담’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주후실언(酒後失言)’, 즉 “술이 머리로 들어가면 비밀이 밖으로 밀려나오게 된다”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술을 마시면 말실수한다는 말을 중국인은 더욱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직장 동료나 비즈니스 파트너 등과 술을 마실 땐 늘 조심한다. 술자리에서 중국인은 상대에게 술을 권하는 것을 좋아한다. 병법이 성행한 중국에선 술자리도 전쟁터와 다름없다. 전쟁이라면 반드시 승부가 나야 한다. 상대를 취하게 만들어야 자기가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나는 한국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에게 “맨 정신으로 놀면 다른 사람들이 재미없다”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야 정이 더 가고 더 빨리 친해진다”는 충고를 종종 듣는다. 심지어 어떤 선배는 “술은 입 안을 경쾌하게 하며 마음속을 터놓게 한다. 따라서 술은 하나의 도덕적 성질, 즉 마음의 솔직함을 운반해주는 물질이 된다”는 말을 하며 한국의 술자리 문화를 설명해줬다. 그제야 중국인처럼 한자리에서 천천히 마시는 게 아니라 2차, 3차는 물론 심지어 5차까지 가는 한국인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마시고 다른 분위기로 다른 술을 마셔야 더 빨리 취하고,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성이 안 차니 폭탄주까지 등장했다. 중국인 친구들에게 소주에 맥주를 섞은 ‘소맥’을 소개해본 적이 있는데 모두 신기해하며 재미있어했다.

두 술자리 문화가 왜 이렇게 다를까. 아마도 유교문화로 인한 수직적 사회 분위기와 조직이 우선시되는 직장문화 때문이 아닐까. 한국인은 평소 예별존비(禮別尊卑)를 잘 지키며 일하고 생활하다 쌓인 스트레스를 술자리를 통해 푸는 것 같다. 특히 중국보다 엄한 직장 분위기에서 상사에게 심하게 혼난 후 저녁에 함께 술을 한잔 하며 푸는 경우도 종종 있다. 평소에 권위적인 상사도 술을 몇 잔 마시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 같고, 사무실에서 좀 무서워 보이는 선배도 술자리에선 조금 더 다정다감해진다. 한국인에게 술자리는 화해하는 자리가 되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편하게 꺼내도 되는 자리로 해석된다. 선배가 자기가 마셨던 술잔을 건네주며 술을 따라주는 동작 자체에 미안함이 담겨 있고 후배를 좋아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 술을 받아 마시면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답이 된다. 언어가 필요없다. 모든 말은 술잔 안에 담겨 있다.

중국인은 술을 마실 때 화려한 건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선 가장 흔히 외치는 말로 ‘위하여’ 짧은 한마디면 다 해결된다. 사람들 앞에서 멋진 시라도 한 구절 읊어야 체면이 서는 중국인과 달리 한국인은 그저 술을 마시는 분위기 자체를 즐긴다. 난 “꽃은 반쯤 핀 것을 바라보고, 술은 반쯤 취하게 마시면 그 속에 아름다운 향취가 있다”는 말을 음미하며 술자리에서 한국인의 정을 느낀다.



천리 1979년 중국 선양(審陽)에서 태어나 선양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숙명여대 박사과정 수료. 한국에 온 뒤 주로 비즈니스 중국어를 가르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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