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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지는 야구판 … ‘한국판 스콧 보라스’ 등장하나

온라인 중앙일보 2013.12.29 02:50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메이저리그에서 ‘악마의 협상가’로 불리는 스콧 보라스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메이저리그 구단주의 겨울 회합이 열린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월트 디즈니월드 리조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USA 투데이]
스포츠 에이전트(Agent·대리인)라고 하면 흔히 두 사람이 떠오른다. 제리 맥과이어와 스콧 보라스다.

국내 스포츠 에이전트 현주소



 1996년 영화 ‘제리 맥과이어’ 속 주인공인 가상인물 맥과이어(톰 크루즈 분)는 진심과 사랑을 역설했다. 그의 고객인 미식축구 선수 로드 티드웰은 “돈을 먼저 보여줘(Show me the money)”라고 외친다. 맥과이어는 티드웰을 설득하고 함께 성공하면서 따뜻한 휴먼스토리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맥과이어의 멘토 디키 폭스는 몇 가지 명언을 남겼다. “고객 모두를 아끼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네.” “가슴이 비었다면 머리는 소용없어.”



 현실 속 인물인 스콧 보라스는 맥과이어와 정반대 유형이다. 지난 22일(한국시간) 추신수(31)가 미국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간 1억3000만 달러(약 1380억원)의 초대형 계약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은 추신수의 능력만큼이나 에이전트 보라스의 수완에 놀랐다.



 추신수는 ‘수퍼 에이전트’ 보라스 덕분에 메이저리그 역대 27위, 외야수로는 역대 6위에 해당하는 대형 계약에 성공했다. 과거 박찬호(40)·김병현(34)의 에이전트였고, 지금도 추신수와 류현진(26·LA 다저스)을 포함해 170여 명의 메이저리거가 보라스를 에이전트로 고용하고 있다. 계약금액의 약 5%를 수수료로 받는 보라스는 지난해에만 1300만 달러(약 138억원)를 벌었다. 선수 몸값을 워낙 올려 놓았기 때문에 악명이 높지만 여러 메이저리그 구단이 보라스 사단에 속한 선수들을 얻기 위해 ‘악마의 손’을 잡는다. 보라스의 협상 전략은 매우 공격적이다. 자신의 고객(선수)을 가장 원하는 구단을 정확히 찾아 지갑을 탈탈 털어낸다. 다른 가치보다 돈을 최우선으로 여겨 협상하고 계약한다. 보라스는 돈으로 말하고 설득하고 인정받는다. “Show me the money”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답을 내놓는다.

 

정부 “스포츠산업 확대” … 도입 적극 추진

한국에는 맥과이어나 보라스 같은 사람이 없다. 한국 스포츠 최대 시장인 프로야구가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축구 등 다른 종목에서 스포츠 에이전트가 활동하고 있고, 야구에선 해외 진출 선수들만이 에이전트를 고용하고 있다. 빠르면 수 년 안에 ‘한국의 맥과이어’ 또는 ‘한국의 보라스’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달 초 ‘스포츠산업 중장기 발전계획(2014~2018년)’을 발표하며 올해 37조원 정도인 스포츠산업 규모를 2018년 53조원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스포츠 에이전트 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프로야구에서 돈 버는 사람은 선수밖에 없다. 에이전트가 등장하면 에이전트의 몫이 생긴다. 선수들의 관리를 위한 보험·연금 등 금융과도 연결된다. 전체 스포츠산업이 풍성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에이전트제도 시행에 관한 근거는 이미 있다. 야구규약 제30조는 ‘대리인을 통해 계약하고자 할 경우에는 변호사만을 대리인으로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리인 제도의 시행일은 부칙에 따로 정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에이전트제도 도입을 야구규약에 넣었지만 구단들의 반대로 12년째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구단들은 에이전트제도의 도입이 선수들의 연봉을 더 올리고, 적자를 감수하며 구단을 운영하고 있는 모기업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최근 문체부의 움직임은 2001년 공정위의 권고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정부는 스포츠산업 활성화를 위해 스포츠산업진흥법 개정을 논의 중이다. 법령으로 정해진다면 국내 프로야구의 에이전트 도입은 시간문제다. 구단들은 에이전트 제도를 여전히 불편해 하지만 더 이상 시행을 미룰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프로야구 시장은 2008년 이후 급성장하고 있다. 2012년 정규시즌 총 관중 700만 명을 돌파했고, 마케팅 수입·중계권료 등이 함께 올랐거나 오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게다가 올겨울 자유계약선수(FA) 15명의 계약 총액이 523억5000만원에 달했다. 구단 직원과 선수가 직접 협상하며 얼굴을 붉히기엔 시장 규모가 너무 커졌다.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정착하기까지 몇 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축구 업무를 맡아온 에이전트는 “에이전트에게도 선수를 대신해 행사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프로야구 구조에서 그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프로축구 선수는 20대 초·중반이면 FA가 되기도 하고, 해외리그에 진출할 수도 있다. 반면 프로야구는 고졸 선수가 최소 9년을 뛰어야 FA 자격을 얻게 된다. 해외 진출 자격을 취득한다고 해도 시장이 넓은 축구와 달리 야구는 선택할 곳이 미국과 일본뿐이라 운신의 폭이 좁다.

 

구단들 인식 전환과 전문인력 확보 필요

미국 메이저리그엔 30개 구단이 있다. 거래 주체가 많기 때문에 FA 이적, 트레이드 등이 활발하다. 아울러 룰5 드래프트(마이너리그에서 3년 이상 뛴 선수들이 다른 구단에 갈 수 있는 제도), 논텐더(재계약 의사가 없는 선수를 풀어주는 제도) 등 선수의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들이 있다. 구단과 에이전트는 선수의 연봉만 갖고 협상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계약 조건을 놓고 공방을 벌인다. 복잡하기 때문에 에이전트가 없으면 계약이 어려운 구조다.



 얼마 전까지 프로야구는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8개 구단 체제로 운영됐다. FA가 되기 전까지 선수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연봉 계약 때 싸워봐야 미운털만 박히고 더 큰 손해를 보기 십상이었다. 연봉 협상은 사실상 통보 형식으로 진행됐다. 공고했던 프로야구단의 카르텔은 2008년 현대그룹이 야구단 운영을 포기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모기업이 없는 히어로즈(현 넥센)가 현대 선수단을 인수했고, 올해 게임업체 NC가 제9구단으로 1군에 진입했다. 또 2015년엔 KT가 가세해 10구단 체제가 완성된다. 다양한 입장과 형태를 가진 구단들이 생기면서 선수 영입 경쟁이 가열될 것이고, 에이전트의 역할 또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 인력 확보도 필요하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4년을 뛰었던 보라스는 은퇴 후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자신이 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구단과 선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다 법률적 지식을 갖춰 협상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학창 시절 운동만 하고 자란 프로야구 선수들에겐 재교육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뛰어난 에이전트가 있다고 해도 선수가 에이전트 수수료(통상 계약액의 5%)를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됐는지도 의문이다. 한 야구인은 “계약할 때 에이전트 덕분에 최소 10%는 더 받는다고 선수가 믿어야 에이전트 수수료를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에이전트의 능력이 수치로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 게 문제다. 보라스가 아니라도 추신수에게 1억3000만 달러짜리 계약을 안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왜 에이전트를 써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선수와 에이전트가 신뢰를 쌓아갈 시간도 필요하다는 의미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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