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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비방쪽지, 영화표 무더기 반환 … "이념공세 포장 반달리즘"

중앙일보 2013.12.27 01:13 종합 14면 지면보기
지난 1일 서울 상계동 N문고에 진열된 소설가 이외수씨의 신간(?마음에서 마음으로?) 위에 놓여져 있던 쪽지. 오른쪽은 영화 ‘변호인’에 대한 별점 테러를 독려하는 일간베스트(일베) 사이트 게시 글 캡처 화면.


‘혼외자식이나 챙기고 반성해라. 늙고 추잡한 노친네’.

[이슈추적]
이외수 신간엔 "추잡한 노친네"
문재인 책에도 "이런 책 읽지마"
'변호인' 티켓 대량 샀다 되물러



 지난 1일 오후 서울 노원구 상계동 N문고에서 이런 쪽지가 발견됐다. 소설가 이외수씨의 신간 『마음에서 마음으로』 표지 위에서다. 같은 날 정동영(전 통일부 장관) 민주당 상임고문이 쓴 『10년 후 통일』 책 위에도 비슷한 쪽지가 놓였다. ‘정동영, X소리 까지 마라’.



 최근 N문고는 이 같은 ‘쪽지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시작은 지난 10월 중순께였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쓴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이란 책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 전 장관을 비난하는 내용의 쪽지가 발견됐다. 이후 1~2주 간격으로 비슷한 내용의 쪽지가 잇따라 등장했다. 주로 진보 성향의 정치인·교수들이 쓴 책이 대상이 됐다. 최근엔 문재인 민주당 의원의 신간 『1219 끝이 시작이다』에도 ‘노무현 XX 장사꾼 XX 문재인’이라며 욕설에 가까운 내용이 적힌 쪽지가 끼어 있었다.



 서점 측은 한 20대 남성 손님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 남성이 매장에 나타날 때마다 비슷한 필체의 쪽지가 발견됐다. 두 달 새 7~8건이나 된다. N문고 관계자는 “현장에서 잡히기만 하면 앞으로 매장에 못 들어오게 조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이버상에서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던 ‘이념 테러’가 서점가와 영화관 등 오프라인 공간으로 번지고 있다. 보수 성향의 일간베스트와 진보 성향의 오늘의 유머 등 온라인 사이트에서 벌어지던 ‘이념 설전’이 실생활 공간까지 파고든 것이다.



 직장인 김수형(30)씨는 지난 10월께 종로의 한 대형서점에서 문재인 의원의 『운명』을 구매했다가 “이런 책 읽지 마라”는 내용의 쪽지를 발견했다. 은평구 Y문고 직원 정도선(31)씨도 “1년에 두세 번쯤 손님들이 진보 인사를 욕하는 내용의 쪽지가 끼어 있는 책을 발견해 들고 올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극장가는 이른바 ‘티켓 테러’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최근 일부 관객이 티켓을 미리 사재기한 뒤 상영 직전 환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른 관객들이 영화를 못 보게 하기 위해서다. 지난 10월 한 관객은 병역 거부 문제 등을 다룬 영화 ‘어떤 시선’의 티켓을 30여 장씩 네 차례 구매했다가 두 차례 상영 직전 취소했다.



 최근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만든 영화 ‘변호인’이 티켓테러를 당했다는 논란도 불거졌다. 지난 23일 한 영화사이트에선 “21~22일 이틀간 ‘변호인’ 티켓을 대량 구매한 사람이 영화 상영 직전 환불하는 일이 10여 차례 발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CGV 측은 “그런 일은 확인된 게 없다”며 “지난 10월 ‘어떤 시선’ 사재기 사건 이후 1인당 8매 이상 예매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고 밝혔다.



 최근 일베 등 보수 사이트를 중심으로 사이버상 ‘정치 테러’를 현실 공간으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일부 일베 회원들은 실제로 대학가를 찾아가 최근 화제가 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찢어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 5월 한 일베 회원은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 도서관의 호남 관련 책에 “5·18(민주화운동)은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낙서한 뒤 인증하기도 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이재현 교수는 “이런 현상은 자신과 다른 성향의 문화·예술을 파괴하려는 일종의 ‘반달리즘’으로 주로 극우 인사들에게서 나타난다”며 “일부 극우 성향의 네티즌들이 주목을 끌기 위해 오프라인 공간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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