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사와 제3자 끝장 협상하게 정부가 자리 깔아라"

중앙일보 2013.12.26 01:47 종합 5면 지면보기
최연혜 코레일 사장(왼쪽)이 25일 서울 은평구 수색동 일대에 있는 철도 사업장을 방문해 노조원들에게 업무복귀를 요구했다. 하지만 노조원들은 “수서발 KTX 법인 설립은 민영화 수순이다. 당장 철회하라”며 복귀를 거부했다. 최 사장이 서울기관차승무사업소에서 노조원들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뉴스1]


철도노조 파업이 25일로 17일째를 맞았다. 역대 최장기 파업이 이어지면서 2005년 미국 뉴욕시 대중교통노조(TWU)의 파업 해결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 '갈등관리 제도화' 촉구
양측 신뢰하는 조정기구 앞세워
정부가 문제 해결 적극 중재해야
미·유럽선 노사정협의체가 맡아



 당시 TWU는 25년 만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지만 3일 만에 백기 투항했다. 로저 투샌 뉴욕시 대중교통노조 위원장은 ‘일단 업무에 복귀한 뒤 협상에 임하라’는 뉴욕시 공공기관 노사관계위원회의 중재안이 노조집행위원회에서 36 대 5라는 압도적 표 차로 통과되자 노조원들에게 업무 복귀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3만4000여 명의 노조원은 60시간 가까이 계속됐던 파업을 중단했다. 여기엔 파업을 하면 자신이 받은 임금의 배를 벌금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테일러법’의 위력이 컸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공기관 노사관계위원회가 신속히 개입해 파업 기간을 단축하고 후유증을 최소화했다는 평가다. 노동자와 사용자 양측에 권위를 인정받은 조정위원들이 객관적으로 사안을 들여다보고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뉴욕시의 공공기관노사관계위원회와 같이 제3자가 참여하는 갈등조정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철도노조 파업뿐 아니라 밀양 송전탑, 진주 의료원, 제주 해군기지 등 사회적 충돌을 일으킨 대형 사건들이 발생했다. 모두 내년까지 갈등이 이어질 수 있는 이슈들이다. 이제는 이러한 사회갈등을 특정 지역, 기관의 이해갈등이나 노사문제로 접근할 게 아니라 ‘공공갈등관리’ 차원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국가들도 정부가 주도해 만든 노사정협의체가 사회갈등 해소의 역할을 해왔다. 노사정협의체의 효시라 불리는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 병’을 극복하는 계기가 됐다. 네덜란드 병이란 자원에 의존한 급속한 성장 이후 물가 및 환율 상승으로 인해 경제위기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독일의 ‘하르츠 개혁’은 실업난을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하르츠’는 2003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던 페터 하르츠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노사정협의체의 역할이 컸다.



 우리나라에도 노사정협의체가 있지만 이들 국가에 비하면 역할이 별로 없다. 지난 10월 황우여 대표는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갈등조정위원회를 구성해 사회 갈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갈등관리기본법’ 발의를 제안했다.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이라는 ‘대체적 분쟁해결 제도’ 도입의 근거를 마련할 법안이다. ADR은 당사자 간 협상이나 조정·중재 등을 통한 갈등 해결 방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법안은 아직 국회에서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박지순 고려대 로스쿨(노동법) 교수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 아주 극심한 노사대립의 와중에도 노동자 측과 사용자 측이 지정한 조정위원이 몇 날 며칠 밤을 새워서 교섭해 문제를 해결한다”며 “양측의 신뢰를 얻는 제3자가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사태를 들여다보고 접점을 찾아내 문제를 풀어나가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판을 만들어주는 게 바로 정부의 역할”이라고도 했다.



 최병학 한국갈등관리학회장도 “밀양 송전탑 사태 때도 정부가 막판에 전문가협의체를 꾸렸지만 이미 파국으로 치달은 상황이라 전문가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어 다 뛰쳐나오고 말았다”며 “이미 실기(失期)한 상태지만 한 번에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고 두 번, 세 번 대화를 거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정치권의 대처 방식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장은 “이전 정권의 경우 대외적으로는 파업이 진행되더라도 핵심 관계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물밑 대화가 있었다”며 “이번에는 (충분한 사전 대화 없이) 노조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함으로써 정부 스스로 대화 채널을 막았다”고 비판했다.



 박지순 교수도 “노동법상으로만 보면 철도노조의 파업이 정당성을 얻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이 파업이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을 얻는 이유는 정치권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노사에 떠넘기는 양상이었기 때문”이라며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노조에 대한 동정심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경희·이윤석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