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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퇴직금 날리는 사회 ③

중앙일보 2013.12.26 00:38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내 이름은 안전빵. 전편에 등장했던 난달라나 재택구는 망할 만했다. 언감생심 퇴직금을 불려보겠다며 빵집이며 주식투자를 하다니, 겁도 없지. 아니나 달라. 제가 잘못해 홀랑 털어먹고는 시스템이 문제네, 은퇴 상품이 없네 나라탓, 사회탓 하소연을 해대는 꼴이라니.



 나 안전빵은 안분지족형,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안다. 닭집·빵집·찻집·밥집엔 애초 관심없다. 초저금리에 대비한 주식·채권 투자? 패가망신할 일 있나, 그런 걸 왜 해. 그럼 퇴직 후 남는 40년을 어떻게 버틸 거냐고?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못 벌면 안 쓴다. 가능한 가늘고 길게 쓴다.’ 그거면 충분하다. 퇴직금 2억원을 한 달 200만원씩 잘라 쓰면 10년을 버틸 수 있다. 그 뒤 한 채 있는 집을 주택연금에 맡기면 다달이 120만원은 되리라. 거기에 국민연금 70만원을 더해 이럭저럭 한세상 살다 가면 족한 것 아닌가.



 퇴직금이 뭔가. 몇 십 년 청춘 바쳐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훈장이요, 내 인생의 계급장 아닌가. 그런 소중한 돈을 왜 허투루 날리냔 말이다. 오래된 명언도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기자·선생·공무원 퇴직금은 먼저 보는 게 임자요 누가 퇴직금 받았다고 알려만 줘도 수수료를 준다는 말은 또 왜 나왔겠나. 안 해본 일 하다가 쪽박 찬 사람이 세상에 널렸다는 얘기 아닌가.



 여기에 하나 더, 재취업은 필수다. 20대 고용률은 줄지만 50대 고용률은 늘고 있다. 다 나 같은 베이비부머가 은퇴 후 식당·공사판 가리지 않고 뛰는 바람에 그런 것 아닌가.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직업에 귀천 없다’는 말은 50대에 꼭 되새겨야 할 명언이다.



 이렇게 준비했지만, 2013년 대한민국은 녹록지 않았다. 웬 놈의 ‘푸어(Poor)’는 그렇게 많은지. 당장 ‘교육비에 허리 휜다’는 에듀푸어가 발목을 잡았다. 대학 졸업 후 취업난에 시달리던 둘째가 더 공부해야겠다며 지난해 유학을 갔다. 한 해 5000만원의 목돈이 들어갔다. 어떻게 일년은 넘겼지만 올핸 결국 퇴직금에 손을 대야 했다. 강남 학부모 한 해 유학비 평균이 4800만원이라더니 남의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뿐이랴. 내년엔 첫째의 결혼, 웨딩푸어가 기다리고 있다. 2011년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 결혼 비용으로 남자는 8078만원, 여자는 2936만원을 썼다. 못해도 5000만원의 목돈이 또 들어갈 판이다. 게다가 전셋값은 왜 이리 미쳐 날뛰는지. 큰아이 전셋값에 보태려면 마지막 남은 퇴직금마저 헐어야 할 판이다. 나는 하우스푸어, 아들은 렌트푸어 신세가 불 보듯하다.



 재취업은 또 어찌 그리 어려운지. 업종 불문, 보수 불문 달려들어 봤지만 취업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환경미화원 뽑는 데 경쟁률이 6대1이다. 모래주머니 25㎏짜리를 들고 뛰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용을 써 봤지만 팔팔한 30대에게 밀릴 수밖에. 그렇다고 아파트 경비직은 쉬운가. 이건 연령 미달이다. 격일제 24시간 근무를 한 달 100만원에 싹쓸이하는 ‘70대 형님’들과는 애초 가격 경쟁이 안 된다. 결국 간신히 주유소 시간제 일자리가 고작. 은퇴 후에도 워킹푸어 신세를 면치 못할 줄 꿈엔들 알았으랴.



 급기야 계획을 수정해봤다. 환갑이 지나면 바로 주택연금으로 노후를 꾸려보자.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주택연금을 신청했다 포기한 3명 중 2명은 아들·며느리 등 가족 반대 때문이란다. 집을 상속받고 싶은 욕심에 자식들이 말리는 것이다. 그런 꼴을 어찌 보랴. 아예 은행 빚이라도 내볼까. 하지만 소득이 없으면 DTI(총부채 상환비율) 규제에 걸려 집 담보 대출도 어렵단다.



 50대 베이비부머에게 2013년 대한민국은 푸어공화국. 일생을 에듀·웨딩·하우스·베이비 등 온갖 푸어에 시달리다 은퇴 후엔 결국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리타이어 푸어’까지. 10명 중 6명이 그런 운명을 못 벗어난다더니 안전빵, 나마저 그 6명에 끼고 말 줄이야.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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