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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수비의 달인을 최전방에 세우다

중앙일보 2013.12.26 00:33 경제 3면 지면보기
은행권에서 리스크(위험) 관리 담당자는 축구의 최종 수비수에 비교되곤 한다. 대출심사나 신용평가를 통해 부실 위험을 차단하는 역할이 상대의 공격을 막는 수비수와 비슷해서다. 100번 잘해도 빛이 안 나지만 한 번 뚫리면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점도 닮았다. 이 때문에 그동안 리스크 관리는 은행원 사이에 기피 업무로 통했다.


신임 행장 3인 '리스크 전문가’
KB 이건호, 리스크관리본부 출신
농협 김주하, 기업 권선주 '여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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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던 리스크 관리 업무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리스크 관리 전문가가 잇따라 시중은행장에 오르고 있어서다. 이건호 KB국민은행장과 김주하 NH농협은행장 내정자, 권선주 IBK기업은행장 내정자가 대표적이다.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낸 이건호 행장은 조흥은행 리스크관리본부장과 국민은행 리스크관리그룹 부행장을 맡았다. 김주하 내정자는 여신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여신제도팀장·여신심사부장을 거쳐 농협금융지주 부사장에 올랐다. 김 내정자는 “1989년 말단 대리 시절에 은행권의 여신거래 약관 마련에 참여한 뒤로 줄곧 리스크 관리 업무를 담당해왔다”고 말했다. 권선주 내정자는 지점에서 20년 넘게 대출심사 업무를 맡은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2년간 리스크관리본부 부행장으로 일했다. 권 내정자는 “여신심사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리스크관리 업무는 크게 ▶여신심사(대출금·대출금리 결정) ▶신용위험 평가(투자기업의 신용등급 평가) ▶여신감리(대출기업의 경영 모니터링)로 나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은행의 유동성을 체크하는 것은 물론 주가·환율·금리와 같은 거시경제를 분석하는 일까지 역할을 넓히고 있다.



 리스크 전문가가 은행장에 잇따라 오르는 건 과거에는 전혀 볼 수 없던 현상이다. 한 시중은행 부장급 인사는 “통상 최전방에서 대출을 확보하는 영업직이나, 최고경영자(CEO) 직속으로 일하는 기획·인사 파트 출신이 행장이나 임원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전임자를 살펴봐도 그렇다. 민병덕 전 국민은행장은 영업의 달인으로 통했고, 조준희 기업은행장은 모든 임직원 인사를 한 번에 단행하는 ‘원샷인사’를 만들어낸 인사통이다. 신충식 농협은행장은 농협 내의 기획통으로 불린다.



 이런 변화는 올 들어 은행의 건전성·수익성이 악화되면서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영향이 크다. 공격보다는 방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현재 국내은행의 부실채권비율은 1.8%로 2011년 2분기 이후 2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STX·동양과 같은 부실기업 구조조정 때문에 손실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금리·저성장 기조가 지속되면서 수익성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국내은행의 올해 순이익은 5조3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지난해(8조7000억원)보다 40% 줄어든 수치다.



 이러자 새로 선임된 금융지주 회장들은 잇따라 부실 감축과 리스크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자연스럽게 은행을 책임질 행장에는 리스크 전문가가 1순위 후보로 떠올랐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은 이건호 행장을 선임하며 “리스크 관리 전문가로서 국민은행의 건전성·수익성·성장성을 동시에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여신업무를 기피하는 풍토는 잘못됐다”며 “여신 업무 담당자에게 승진·보수에서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김주하 내정자 임명으로 현실이 됐다. 임 회장은 “여신 심사를 거친 농협 내 금융전문가”라며 임명 이유를 설명했다. 권선주 내정자를 청와대에 제청한 금융위원회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리스크 관리를 통해 은행의 건전성을 제고하면서 창조금융을 펼칠 적임자”라는 것이다. 기업은행은 조준희 행장이 내실경영을 위해 여신심사 업무를 핵심 보직으로 대접하면서 위상을 높여놨다.



 리스크 전문가의 중용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경기가 크게 좋아지지 않는 이상 은행권이 예전 같은 고수익을 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한 대형은행 임원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능숙한 리스크 전문가의 역량이 돋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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