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아침에 북 히트곡 된 '그이 없인 못 살아'

중앙일보 2013.12.23 00:46 종합 6면 지면보기


평양에선 지금 장성택 지우기가 한창이다. 조선중앙TV나 노동신문 어디에도 ‘장성택’이란 이름이나 사형집행(지난 12일)과 관련한 이야기는 없다.

노동신문 1면에 김정은 찬양가
로드먼 부르고 주말엔 스포츠 경기
김정은 '단풍 신화' 대대적 선전
재입북 탈북자 동원 대남 비방



 대신 21일자 노동신문은 1면 전면에 『그이 없인 못 살아』라는 노래의 악보와 가사를 컬러로 편집해 실었다. 김정은의 웃는 초상을 가운데 싣고 마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旭日旗)를 연상케 하는 후광이 사방으로 번지는 형상도 담았다.



 신곡이지만 하루아침에 평양 최고의 인기곡으로 떴다. ‘친근하신 그이의 음성 가슴에 흘러…’로 시작하는 노래는 ‘우리의 운명 김정은 동지, 그이 없으면 우린 못 살아’라는 후렴구로 끝난다. 패티김이 불러 히트한 『그대 없이는 못 살아』의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라는 가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 악보에는 ‘절절하게 부르라’는 주문이 달려 있다.



 노동신문은 22일에는 1면에 이 노래에 대한 반응을 실었다. 노래가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을 하늘처럼 믿고 사는 천만 군민의 심장의 분출”이라고 주장하면서다.



 이 신문에 따르면 만수대예술단 조일룡은 “가사도 걸작이지만 끝없는 매혹과 신뢰, 더없는 환희와 밝은 미래에 대한 신심으로 가득 찬 선율도 명선율”이라고 찬양했다.



 고위 인사들이 앞다퉈 찬양하는 분위기라 주민들도 협동농장과 공장·기업소 등에서 노래를 익히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고 한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장성택 처형으로 충격에 휩싸인 주민들에게 딱딱한 강연보다는 노래로 충성과 결속을 유도하려는 김정은식의 ‘가요정치’”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평양에선 겨울철 비수기인데도 지난 주말에 다양한 스포츠 경기가 열렸다.



 22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는 횃불팀과 용악산팀의 남자 축구경기가 개최됐다. 또 김정일 2주기 추모대회가 열렸던 평양체육관에서는 레슬링 경기가 펼쳐졌다. 오는 29일에는 이곳에서 여자권투 경기가 열린다.



 조선중앙통신은 21일 내각 체육성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주말마다 체육경기를 조직·진행하는 것을 정례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지난 20일 방북한 전미농구협회(NBA) 출신 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북한 선수를 지도하는 모습도 관영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북한의 때아닌 스포츠 붐도 장성택 처형 사태와 관련됐다는 분석이다. 주민들을 스포츠에 몰입시킴으로써 흉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것이란 얘기다.



 ‘가요정치’건, ‘비수기의 스포츠 경기’건 모두 ‘공포정치’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려는 대내용 유화책인 셈이다.



 스포츠의 경우 장성택이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을 맡아 북한 스포츠를 주도해 온 것과 연관됐을 수도 있다. 그가 없어도 스포츠 경기는 정상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주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성택 사후 2인자 자리를 차지한 ‘최용해 띄우기’도 벌어지고 있다. 관영언론은 그의 아버지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이 1963년8월 백두산 방문 때 김정일(당시 21세)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애쓴 일화를 소개하며 충신의 본보기로 내세우고 있다.



 북한군에는 때아닌 ‘단풍’ 바람이 불고 있다. 군부대 산하에서 일하는 ‘8월25일수산사업소’가 한 해 1000t의 물고기밖에 잡지 못하다 지난 5월 이후 6개월 동안 4000t을 잡는 성과를 거뒀는데, 김정은이 5월 ‘단풍호’라고 이름 붙인 새 어선을 준 게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관영언론이 대대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노동신문은 ‘단풍’과 관련한 논설을 전면에 걸쳐 게재하면서 김정은의 은덕으로 수산사업소가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과를 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21일 평양의 군부대 산하에서 일하는 수산부문 관계자를 집결시켜 열성자회의도 개최했다.



 김정은은 장성택을 처형한 직후 강원도 원산의 마식령스키장 건설현장에 갔다가 이 수산사업소에 들렀었다. 이후 ‘단풍신화’를 만들어 선전전에 활용하는 한편 군부엔 “물고기를 더 많이 잡으라”고 독려하고 나선 양상이다.



 20일 평양 고려동포회관에선 남한에 정착했다 북한에 돌아간 탈북자 최계순(64·여)씨를 등장시킨 좌담회도 열렸다. 최씨는 자신이 “중국에 사는 언니를 찾아갔다가 인신매매꾼들에 의해 남한에 끌려갔다”고 주장했다. 또 “남조선 사회는 인간의 정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없는 냉혹한 사회”라고 비난했다. 북한이 탈북자의 귀환을 대남 비방에 써먹은 건 올 들어서만 다섯 번째다.



 지난 17일 김정일 사망2주기 이후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흐름과 관련해 정부 당국자는 “이제 반당 종파세력 척결은 완료했으니 김정은 집권 3년차에 초점을 맞춰 분위기를 전환해 보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이영종 기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