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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장태동씨의 '문제해결형 민주주의'

중앙일보 2013.12.23 00:13 종합 36면 지면보기
전영기
논설위원
국번 없이 전화번호 110을 눌러 보셔요. “안녕하십니까. 정부 대표전화 110, 정부 민원안내 콜센터입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국민권익위라는 정부 기관이 운영하는 전화번호입니다. 권력기관과 거리가 멀고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예산을 팍팍 쓸 수 있는 부처도 아니랍니다. 대한민국의 해결하기 어려운 온갖 민원이 몰리는 하수종말처리장 같은 곳이죠.



 그런 국민권익위가 6년간 끝 모를 갈등으로 치닫던 군산 송전탑 문제를 4개월 만에 풀어냈습니다. 신념과 투쟁은 넘치는데 책임과 해결은 결핍된 사회,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문제 해결의 주인공은 9급 면서기에서 출발해 33년째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장태동(55) 특별조사팀장이었습니다. 장 팀장을 만나보니 한눈에 그 나이 공무원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성과 성취욕, 일의 노하우와 모험심을 갖추고 있더군요.



 ‘군산 송전탑 문제’ 갈등의 두 축은 법과 원칙대로 건설을 밀어붙이려던 한국전력과 1008명 지역주민의 대책위입니다. 여기에 장태동 팀장의 특별조사팀 3명이 조정자로 뛰어든 겁니다. 한전은 대법원 승소 판결과 국책사업이라는 명분, 예산과 조직까지 거머쥔 강자였으나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많은 주민은 무슨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비춰지는 데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일부 노인은 ‘나는 내일 죽으면 그만이지만 후손에게 백혈병·소아암을 걸리게 할 수 없다’는 사생결단식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정자에게 다행스러웠던 건 대책위와 주민이 신뢰 관계로 똘똘 뭉쳐 있는 점이었습니다. 똘똘 뭉쳐 있는 반대세력은 역설적이게도 리더십만 설득하면 일괄타결하기가 쉽다고 하네요.



 -군산 송전탑 민원의 특징은.



 “밀양에서 보듯 송전탑 문제는 민원 조사관으로서 탐낼 만한 도전적인 주제다. 어려울수록 보람이 있지 않을까. 실패하면 어마어마한 비난이 쏟아지기에 손을 대면 꼭 성공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군산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첫째, 대책위가 외부 세력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둘째, 주민들이 3000만원 자비를 들여 전북대에 용역을 의뢰해 대안 노선을 제시했다. 문제 해결의 진심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대안 노선은 군산 미 공군기지를 지나는 ‘안보상의 문제’가 있는 데다 600억원 이상의 추가 예산이 든다는 점에서 한전으로서 수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해결했나.



 “경청과 설득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경청에 목말라 했다. 한전에 대한 불신이 심했다. 우리는 4개월 동안 15차례 대책위 사람들을 만났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의 비율을 8대2로 했다. 주민들은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주민 상경투쟁 때 한전 조환익 사장과 ‘안보상의 문제만 없다면 대안 노선을 건설할 수 있다. 단,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합의가 약속대로 이행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실제로 대책위 지도자인 강경식(50) 간사는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조 사장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제 한전 측을 상대로 미 공군기지를 관통하는 대안 노선을 적극적으로, 정성스럽게 추진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장 팀장의 몫이 됐습니다.



 -비행 위험성을 들어 미 공군이 대안 노선을 거부하면 어떻게 할 건가.



 “그 문제가 3자 합의의 최대 쟁점이었다. 한전은 미 공군이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의 낮은 높이로 송전탑을 짓기로 했고, 주민들은 미 공군이 거부하면 대안 노선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미 공군의 대안 노선 검토 결과는 6개월 뒤에 나옵니다. 미군도 주둔국의 민감한 지역 이슈에 성의를 보여줄 것 같습니다. 군산 송전탑 케이스는 ‘운동권 민주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문제해결형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음을 보여준 희망의 신호 아닐까요. 문제해결형 민주주의는 법과 원칙, 이념과 외부 세력에 앞서 경청과 설득, 정성과 믿음 같은 인간적 요소를 중시합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인간적 예의와 태도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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