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윽고 서울대 김성균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가 강단에 올랐다. 김 교수는 ‘걷고 싶은 거리 1호’인 덕수궁길의 설계자(1998년)다. 이날 강의는 ‘걷고 싶은 길 1호인데 관광버스 위해 좁힌 덕수궁길’이란 제목의 기사가 지난달 26일 본지에 나간 이후 서울시가 전문가의 의견을 듣자며 마련한 자리였다. 서울시 보도환경개선과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유사한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해 서울시내 실무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강의”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강연 내내 “걷고 싶은 거리를 제대로 조성하려면 한국적 조형물인 ‘정자’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자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게 지어진다”는 거였다. 김 교수는 “이 원리를 거리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덕수궁길 설계 과정도 설명했다. “ 돌담길에 면해 있는 모든 건물의 벽돌 색을 색채 측정기로 정밀하게 측정했어요. 걷고 싶은 거리의 보도 블록을 주변 건물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색으로 설계하기 위해서였죠.”
덕수궁길의 모양뿐 아니라 길로 주변 경관을 끌어 오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덕수궁길이 2011년도 국민이 뽑은 가장 사랑하는 길 1위가 됐다고 김 교수는 소개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최근 주변 경관과의 전체적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보도 블록을 교체했다. 사괴석도 아스팔트로 덮어 버렸다. 덕수궁 걷고 싶은 길이 공사 이전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비단 덕수궁길뿐만 아니라 서울시 자치구 차원에서 조성한 걷고 싶은 거리 중 일부는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지은 게 적지 않았다. 서울 은평구 서부시장길, 양천구 신월동의 걷고 싶은 거리 등이 그랬다. 재래시장과 주택가가 혼재한 동네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었다가 이후 원상 복구 결론이 났다. 시류를 앞서가지 못하고 뒤따라 간 결과 실속 없는 ‘전시행정(展示行政)’의 사례로 낙인이 찍힌 셈이다.
김 교수가 강의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세종시 신정부청사도 주변 풍경에 대한 고민이 없어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고 비판할 때였다. 청중석 일부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60명 중 절반가량이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마치 ‘전시용 강연’을 본 것 같아 강연이 끝난 후에도 씁쓸함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구혜진 사회부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