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폭력성 없어도 민주적 가치 부정하면 정당 해산”

중앙선데이 2013.12.21 23:10 354호 3면 지면보기
디터 그림 독일 훔볼트대 교수로 12년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했다. 정치관계법 및 헌법사(史) 전문가로 베를린 한림원 평생회원이다. 프랑크푸르트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에서 법학석사를 땄다. 박사학위는 모교인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취득했으며 현재 미국 예일대와 캐나다 토론토대 등에서도 강의 중이다.
격렬한 논란 속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사건의 첫 변론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다. 정치적 자유 보장과 종북세력 척결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충돌하면서 과연 통진당을 없애는 게 법적으로 정당하냐를 놓고 찬반 양론이 뜨겁다. 이런 가운데 유일하게 합법적 절차를 거쳐 두 개의 정당을 해산시킨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 출신인 디터 그림(76·사진) 훔볼트대 교수가 헌법재판연구원 주최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했다. 지난 12일 그림 교수를 만나 독일은 왜, 어떻게 문제가 된 정당들을 사라지게 했으며 그 결과는 어땠는지를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독일 헌재 재판관 지낸 디터 그림 훔볼트대 교수

-독일 헌재의 정당 해산 배경과 과정은.
“그간 독일에선 세 번의 정당해산 청구가 있었는데 그중 두 건이 받아들여졌다. 정당 해산이 이뤄진 건 모두 1950년대였다. 52년에 신나치정당인 ‘사회주의국가당(SRP)’이, 56년엔 ‘독일공산당(KPD)’이 헌재 결정에 따라 없어졌다. 이들이 없어지게 된 건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나치 집권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어 정당 해산 문제를 중요하게 규정하고 있다. 히틀러는 급진적 혁명이 아니라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이로 인해 독일에선 특정 정당이 국가 전복을 기도하거나, 폭력성을 띠지 않더라도 민주적 가치를 부정하면 해산을 할 수 있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SRP는 공공연히 정부 전복과 독재국가 수립을 주장했기에 해산시키는 데 별다른 이견이 많지 않았다. 반면 공산당인 KPD의 경우 헌재에서 장문의 판결문을 준비했다. 책 한 권 분량인 320쪽짜리였다. 재판부는 공산당의 역사에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식민지 이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뤘다. 여기에다 당 간부들의 연설과 공식 인쇄물 내용까지 일일이 검토했다. 그래서 공산당이 민주 질서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당 해산 여부, 구체적 증거가 관건
-기각된 케이스도 있었나.
“2001년 연방정부와 의회에서 낸 ‘민족민주당(NPD·신나치 정당)’에 대한 해산 청구가 6~7년간의 심리 끝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간부가 과격한 주장을 편 건 사실이었지만 이게 당의 공식 입장이라고 증명할 구체적 증거가 부족했다. 과거엔 신분을 위장한 비밀경찰이 당 내부 조직으로 깊숙이 들어가 증거를 수집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NPD의 경우 경찰이 위장 요원을 몰래 침투시킨 게 발각돼 사회 문제가 됐었다. 이 때문에 경찰은 당의 공식 인쇄물만을 증거로 제출할 수밖에 없어 NPD가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증명해 낼 수 없었다. 결국 해산 청구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얼마나 증거가 확실한가에 따라 결정됐던 것이다. 아울러 독일 정세가 안정되면서 굳이 군소정당까지 해산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확산됐다.”

-정당해산 심판의 특별한 점은.
“원래 헌재 심판을 위해선 증거 수집을 하지 않는다. 관련 법규가 제대로 적용됐는지 등을 따지는 법률심인 까닭이다. 그러나 정당해산 심판의 경우엔 관련자들의 증언을 일일이 듣고 증거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봤다. 이 때문에 공산당 해산의 경우 심판 청구부터 해산 결정에 이르기까지 4년여가 걸렸다. 사건을 신중하게 검토했던 또 다른 이유는 해당 사건이 유럽인권재판소로 넘어가 또다시 다뤄지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유럽통합 이후 주요한 사건은 유럽연합(EU) 전체 차원에서 다뤄지게 된다. 그런데 유럽인권재판소가 중시하는 건 독일 헌재와 상당히 다르다. 독일 헌재는 문제가 된 정당이 민주적 질서를 존중하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유럽인권재판소에선 개인의 정치적 자유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런 이유로 독일 헌재의 정당해산 결정이 뒤집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당 해산하면 지하로 숨는다
-정당 해산과 관련된 논란은 없었나.
“국론이 크게 양분됐다. 가장 큰 반론은 정당을 없앨 순 있지만 그걸 만든 사람들은 여전히 남는다는 거였다. 따라서 이들이 지하로 숨으면 더 과격해지고 위험해지니 그대로 놔둬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다. 지금의 독일은 안정되고 특정 정치세력이 날뛰어도 별 지장이 없지만 50년대엔 상황이 달랐다.”

-정당 해산 뒤 어떻게 됐나.
“신나치정당 SRP는 사라졌지만 공산당의 경우 여러 개의 비슷한 아류 정당이 생겨났다. 특히 68년 격렬한 학생운동이 유럽을 휩쓸면서 마오당, 레닌당 등 여러 개의 공산당이 출현했다. 그러나 당시엔 공산당뿐 아니라 다른 과격단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공산당만 해산시키는 건 무리’라며 그냥 놔두자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헌법학자인 그림 교수는 동서독 통일이 이뤄지기 2년 전인 87년부터 12년간 헌재 재판관을 지냈다. 이 덕에 독일통일 과정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법률 문제, 특히 헌법과 관련된 문제에 정통하다. 프랑크푸르트대를 졸업한 그는 독일뿐 아니라 미국 하버드대와 프랑스 파리대에서도 공부해 국제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다.

-동서독 통일 후 법률 문제는 없었나.
“왜 없었겠는가. 우선 동독 법을 얼마나 어느 정도 인정해 줄 것인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통일 이후 양 체제가 통합되는 과도기에 서독의 법률체계를 어디에 얼마나 적용할지 결정해야 했다. 결국 이 문제는 통일 이후 서독 법을 원칙으로 삼되 여기서 다루지 않은 영역은 기존의 동독 법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와는 별도로 두 개의 심각한 정치적 난제가 발생했다. 첫째는 동독인들의 소유권 인정 부분이었다.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에선 옷·책과 같은 정말로 개인적인 물품 외에는 개인 소유가 인정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통일 후 동독에 있던 부동산이나 공장 등을 누구에게 줄지가 큰 난제로 떠올랐다. 이 문제는 해당 시설과 관련된 개인, 즉 공장의 공장장과 같은 사람들에게 주되 이들로부터 일정 규모의 투자를 받는 식으로 소유권 문제를 풀었다. 다음은 낙태 문제였다. 한때 ‘독일 통일이 낙태 때문에 실패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동독에선 낙태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반면 서독에선 쉽지 않았다. 치열한 논란 끝에 낙태를 허용하되 시술 전 전문가와의 상담을 의무화했다. 아울러 무료 탁아소 증설을 비롯해 출산·육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조치가 마련됐다.”
 
어떻게 북한에 법률 적용할지 준비해야
-통일을 앞두고 한국이 준비할 게 있다면.
“서독 정부에는 통일 관련 부처가 있었지만 동독과 합치기 수년 전에 없어졌다. 통일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던 거다. (웃음) 이 탓에 통일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법률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동독은 제대로 발달된 나라가 아니었다. 헌법과 형법·민법 등 중요한 몇몇 법률만 있지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법률이 없었다. 특히 국가정책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행정법은 아예 없었다. 중요한 건 모두 공산당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는 탓이다. 북한도 그럴 거다. 따라서 동독과 북한처럼 법률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지역에 어떻게 고도화된 법 체계를 적용할지 미리 검토해 두는 게 바람직하다. 동독 내 법률가 부족도 심각한 문제였다. 통일 당시 동독엔 변호사 600명에 판사 1000명이 전부였다. 서독엔 10만 명의 변호사와 2만 명의 판사가 있었다. 두 나라 간의 차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수치다. 동독 판사의 절반인 500명 정도가 통일 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이들은 처음엔 서독 판사와 함께 앉아 재판을 진행해야 했다.”

-통일 후 동·서독 법률 간의 상충과 갈등도 적지 않았을 텐데.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동독에서 일어난 일은 동독 법으로 다스린다는 원칙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동·서독으로 갈렸을 당시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하는 동독 주민을 사살했던 경비병들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물론 동독 법으로 보자면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이어서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반인륜적인 명령은 거부해야 한다는 정신에 따라 이들도 처벌했다. 다만 처벌 내용은 상부 명령을 따르지 않기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 극히 경미한, 상징적인 수준이었다. 이 밖에 동독 스파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동독뿐 아니라 서독에서도 스파이를 동원한 첩보활동을 했다는 점을 감안해 이들에겐 죄를 묻지 않았다.”

-한국에선 헌법소원이 폭주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헌재 재판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87년에는 한 해 4000여 건이 접수됐지만 요즘엔 6000건 넘게 들어온다고 한다. 이 중 95% 이상이 본격적으로 심리를 할 필요가 없는, 의미 없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헌법소원 제기 비용이 극히 적어 남용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에서 패배한 소송당사자가 변호사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느냐’고 물으면 변호사는 ‘헌법소원이라는 게 있는데 비용도 거의 없다’고 대답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니 헌법소원이 몰려드는 거다. 미국은 중요한 사건 60건만을 뽑아내고 나머지는 돌려보낸다. 독일 헌재는 그렇게까진 하지 않는다. 3명의 재판관이 사전 검토를 하게 되는데 전원이 의미 없다고 의견 일치를 보면 간단하게 기각 이유를 써서 돌려보낸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