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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수 끝에 즉위한 공민왕, 원 쇠망 타고 反元 개혁

중앙선데이 2013.12.22 01:22 354호 26면 지면보기
공민왕 신당. 서울 종묘의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 귀퉁이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조용철 기자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奇轍)·권겸(權謙)·노책(盧鑠)을 반역을 꾀했다는 죄로 처단한다. 기철은 기 황후의 오빠이다. 권겸은 원나라 황태자(기 황후 아들)의 장인이다. 노책은 딸을 원나라 순제에게 바쳤다. 세 사람 모두 원나라 황실의 일족이 되어 고려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린 인물들이다. 공민왕은 세 사람과 그 일족을 처단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유명한 반원(反元) 개혁을 단행한다. 이해 6월 공민왕은 인당(印璫)에게 군사를 주어 압록강 이동·이서 지역의 원나라 역(驛) 8곳을 공격하게 한다. 7월엔 쌍성(雙城)총관부를 점령함으로써 약 100년 만에 원나라에 빼앗긴 동북 지역(※함경도 일대)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킨다.

고려사의 재발견<끝> 기 황후와 공민왕

이해 7월 원나라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공민왕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적신(賊臣) 기철이 노책·권겸과 반역을 꾀했습니다. 그들은 원나라 황실과 혼인한 것을 계기로 황실의 위엄을 빌려 국왕을 협박하고 백성들의 토지 등 원하는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제가 원나라를 두려워해 문책을 못하니 백성들의 원한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기철 등은 천하(※중국 대륙)가 병란에 싸이자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을까 염려해 모든 요직에 자기들의 심복을 심어두고, 무기를 만들어 공공연하게 연습하고 온갖 유언비어로 선동했습니다. 드디어 금년 5월 18일 무뢰배를 모아 무기를 싣고 궁궐을 습격하려 했습니다. 이에 원나라에 알릴 틈도 없이 처단했으며, 살아남은 무리들이 변방으로 도망한 것을 추격하다 본의 아니게 압록강을 넘게 되었습니다.”(『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7월)

고려 왕조에 반역한 기철 일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망친 잔당을 잡으려다 쌍성총관부와 압록강 건너 원나라 역을 공격했다고 변명했다. 공민왕은 압록강을 건넌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의심에서 벗어나려 했다.

원나라의 쇠망과 한족의 흥기
기철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기철 일당은 천하가 병란에 싸이자 권세를 잃을까 염려해 모든 요직에 심복을 앉혔다’는 공민왕의 해명에 진실이 담겨 있다. 기철 일당의 세력 확장이 왕권을 위협했기 때문에 공민왕이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대륙 정세의 급변도 그런 조치를 취한 또 다른 배경이다.

공민왕은 원나라 요청에 따라 1354년(공민왕 3) 대륙의 한족(漢族)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유탁·염제신·최영 장군 등에게 고려군 2000명에다 현지 고려인 2만 명을 붙여 원나라에 파견한다. 이들은 이듬해 귀국하면서 원나라의 쇠망과 한족의 흥기를 상세하게 보고한다. 공민왕은 이러한 대륙 정세를 읽고 기철 등을 제거했다. 쇠망의 길로 접어든 원나라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공민왕은 꿰뚫어 본 것이다.

기씨 일족은 1340년 3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된 이후 고려 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기 황후 덕에 부친 기자오(奇子敖)와 모친 이씨는 제후의 지위인 영안왕(榮安王)과 영안왕 대부인(大夫人)으로 각각 책봉된다. 이미 사망한 부친을 대신해 살아있던 모친이 극도의 환대를 받는다. 고려 국왕은 매년 이씨 집을 방문해 잔치를 열었다. 1353년(공민왕 2) 기 황후 아들이 원나라 황태자로 책봉되자, 원나라는 황족을 보내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당시 잔치의 모습이 다음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신당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공주(※공민왕 비)와 태자(※원에서 보낸 황족)는 남쪽에 앉고, 왕(※공민왕)은 서쪽에, 이씨는 동쪽에 각각 앉았다. …잔치가 끝날 무렵 사신과 그 수행원은 서쪽 계단에, 호위 무사는 동쪽 계단에 각각 앉아 고기 많이 먹기 내기를 했다. 잔치 후 모두 뜰에 내려와 비단 1필을 서로 이어 잡고 호가(胡歌:몽골 노래)를 부르고 춤추면서 서너 차례 뜰을 돈 후 비단을 잘라 나누어 가졌다. 잔치에 베를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무려 베 5140필이 들었다. 다른 물건도 이 정도의 기준에 맞춰 준비했을 정도로 잔치는 매우 사치스러웠다.”(『고려사』 권131 기철 열전)

고려 국왕과 이씨는 같은 제후왕으로 마주 앉았다. 기씨 일족이 공민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는 증거다. 5000필이 넘는 베를 잘라 꽃을 만들어 장식할 정도로 호화판 잔치였다. 이 잔치에 참석한 원나라 사신들이 ‘묵을 공관이 부족해 무려 30여 곳의 재상들의 집에 유숙했다’(『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2년 8월조)고 말할 정도였다.

충혜왕과 기 황후의 악연
기 황후 모녀가 각각 제 2황후와 영안왕 대부인으로 책봉되면서 당시 국왕 충혜왕(1330∼1332년, 1339∼1344년 재위)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충혜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승상 연철목아(燕鐵木亞)는 그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아들처럼 대했다.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연철목아는 황제에게 상소해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려사』 권109 이조년 열전)

연철목아는 1330년 충혜왕 즉위를 도운 인물이다.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가 낳은 왕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충혜왕은 고려 왕비가 낳은 왕자이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없는 혈통상의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실권자 연철목아의 든든한 후원 덕택이었다.

연철목아는 원나라 황제 순제의 즉위에도 관여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순제의 즉위(1333년)를 승인한 당시 원나라 최고의 실권자였다.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기 황후는 연철목아의 딸이자 순제의 정후인 답납실리(答納失里)로부터 큰 고통을 받았다. 연철목아와 그 일족은 순제 역모 사건으로 1332년 정적 백안(伯顔)에게 제거된다. 그의 실각으로 충혜왕도 이해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런 연유 때문에 충혜왕과 기 황후는 불편한 관계였다.

충혜왕이 1339년 11월 부왕 충숙왕이 사망해 두 번째로 즉위한다. 그런데 4개월 후인 1340년 3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어 원나라의 새로운 권력자로 군림한다. 8년 전 순제를 제거하려 한 연철목아의 후원을 받은 충혜왕은 기 황후의 등장으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충혜왕은 이해 3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원나라에 파견한다. 또한 기 황후의 재정기관인 자정원(資政院) 책임자인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이듬해(1341년) 2월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으로 책봉한다. 충혜왕이 기 황후의 환심을 얻어 국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였다. 이러한 충혜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기 황후 일족을 중심으로 한 부원(附元) 세력이 고려에서 활개를 치는 빌미를 제공했다. 기 황후 역시 충혜왕 재위 동안 자신의 일족이 고려에서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정국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철은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8월 충혜왕이 음란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원나라에 올린다.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에 기용된 지 불과 3년 만에 기철은 국왕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정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결국 충혜왕은 이듬해(1344년) 기 황후의 측근 환관 고용보에 의해 체포되어 원나라로 압송되어 왕위를 잃는다. 충혜왕은 원나라에서 유배 도중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기 황후, 편협한 정치로 역사의 혹평
이어 충혜왕의 8살짜리 아들 충목왕이 즉위한다. 환관 고용보가 그를 안고 황제에게 선을 보인 후였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을)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충정왕을 내세웠다’(『고려사』 권38 공민왕 총서)고 한다. 기 황후 일족이 공민왕 대신 충혜왕의 서자이자 11살짜리 나이 어린 충정왕을 선택한 것이다. 기 황후 일족이 고려 국왕 임명에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다.

이때 20세의 공민왕은 나라 사람의 신망을 받는 훌륭한 제왕의 자질을 지녔으나 두 번이나 국왕에 임명되지 못했다. 충정왕이 재위 약 2년 만에 죽자 그때야 즉위한다. 충혜왕의 동생인 공민왕이 높은 신망을 받고도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역시 원나라 공주 소생의 자식이 아니라는 혈통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형인 충혜왕의 죽음을 목격했고 3수(修)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오른 공민왕과 기 황후 일족의 관계는 원만할 수 없었다. 즉위 5년 만에 기철 일당을 제거한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원나라의 쇠망과 맞물려 큰 저항 없이 단행되었다.

기 황후는 일족과 측근이 제거되자 황제와 태자에게 복수를 요청한다. 고려 출신 원나라 고위 관료 최유(崔濡)는 기 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기로 결정한다. 1363년(공민왕 12) 5월 고려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고려는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요새에 군사를 배치한다.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1363년(공민왕 12) 6월 고려를 침공했으나, 이듬해 1월 마침내 패배한다.

이듬해(1364년) 5월 원나라는 사신을 보내 덕흥군 옹립과 공민왕 폐위에 앞장선 인물들의 처단을 통보하면서, 6월엔 공민왕을 다시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다.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고려가 신흥 한족과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4년 후 원나라는 신흥국 명나라에 쫓겨 몽골 지역으로 쫓겨났다. 1365년 12월 기 황후는 원나라 황제의 정후(正后)가 되지만 빛바랜 영화에 불과했다. 온 생애를 바쳐 얻은 권력으로 원나라에선 자신과 황태자, 고려에선 일족의 안녕과 지위를 유지하려던 그녀의 편협한 정치는 모국 고려에서조차 외면을 받아 역사의 혹평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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