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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평균 수준이 못된 너희들을 위해

중앙일보 2013.12.20 01:13 종합 32면 지면보기
강홍준
논설위원
서울행정법원 13부(부장 반정우)가 지난 16일 내놓은 판결문엔 ‘평균 수준의 수험생’이라는 구절이 11번 나온다. 판결문은 올 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에 대해 “출제 오류로 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수 1만1837자(표, 그래픽, 보충자료 제외), 낱말 3505개로 구성돼 있다. ‘평균 수준의 수험생’이라는 구절만큼 결론 부분에 도달할수록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평균 수준의 수험생으로서는 이 문제의 답항을 ②로 고르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평균 수준의 수험생’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일단 판결문을 뒤져봤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에 대한 정의는 내려져 있지 않았다. 8번 문제는 유럽연합(EU)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비교하는 네 가지 보기를 주고 옳은 설명만을 고르도록 한 문제다. 이 문제를 푼 학생은 3만7684명, 수능을 출제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②를 고른 정답률은 49.89%였으니까 정답자보다는 오답자가 많다. 세계지리에서 1등급을 받은 학생은 모두 이 문제를 맞혔으며 2등급자는 91%, 3등급자는 80%, 4등급자는 64%가 정답을 맞혔다. 그 이하인 5~9등급자의 정답률은 50%가 안 된다.



 정답자보다 오답자가 많고 1~4등급을 받은 학생 비율(41%)보다 5~9등급 비율(59%)이 더 높은데도 재판부가 말하는 평균 수준은 오답자나 5~9등급을 받은 학생이 아닌 건 분명하다.



 다만 평균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문장이 있긴 하다.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자료인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는 평균 수준의 수험생이 알기 어려우며 평균 수준의 수험생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EU와 NAFTA의 2012년의 총생산량을 쉽게 알 수 있다고 볼 증거가 없다.”



 그렇다면 재판부가 말하는 평균 수준의 수험생이란 1~4등급에 속해 대학에 갈 등급 수준이 되는 사람으로서 신문과 방송 뉴스를 볼 여유가 없이 교과서나 EBS교재만 죽어라고 파는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마음대로 정의를 내려도 재판부에 대한 무례나 판결문 곡해는 아니라 생각한다. 어차피 재판부가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으니까.



 웬만해선 법원의 판결에 토 달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평균 수준의 사람이 소송을 내는가, 아니면 억울한 사람이 법원에 오는가. 법의 구제를 받고 싶은 사람이 법원에 오는 게 아닌가. 재판부 기준대로라면 우리나라 평균 수준의 수험생은 결국 소송까지 할 이유도 여유도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심지어 재판부는 원고들에 대해 “수능을 치기 이전에 2012년 총생산액 규모를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소송을 낸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통해 2012년 총생산액을 알았는지 밝히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수험생으로선 사전에 알 턱이 없는 자료를 시험 친 다음에 뒤늦게 가지고 와 시비를 건다는 뉘앙스다.



 팩트는 ‘2012년을 기준으로 할 때 총생산액은 EU보다 NAFTA의 규모가 크다’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봤건, 인터넷이나 영어로 된 전문 자료에서 봤건, 시험 보기 전에 알았건, 나중에 알았건 팩트는 움직일 수 없는 팩트다.



 이런 판결문 덕분에 평가원은 안도할 것이다. 세계지리 성적을 다시 낸다면 입시 대란을 맞았을 텐데 이를 피할 수 있게 됐으니까. 출제위원과 검토위원, 이의신청을 접수하고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낸 한국경제지리학회나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학자들도 한시름 놓을 것이다. 학자나 교사로서의 경력에 주름이 생기지 않게 됐으니까.



 그런데 좀 부끄럽지 않은가. 그러니 “웬만하면 다 푸는 문제인데, 왜 너만 못 푸느냐”고 말하지 말았으면 한다. 잘못은 평균이 못된 아이들에게 있지 않다. 오류가 있는 문제를 낸 출제위원, 정정할 기회를 날려버린 평가원과 학회에 있을 뿐이다.



 원고 59명이 항소심까지 갈지, 아니면 제풀에 꺾여 중도 포기할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평균이 못된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 팩트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오류 지적에 눈감는 부끄러운 어른은 닮지 말자고.



강홍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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