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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말값' 찾기

중앙일보 2013.12.20 01:06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바른 용어 토론회. 한국경제연구원 사회통합센터가 올 한 해 꾸준히 해 온 토론회다. 지난 16일에도 열렸다. 주로 이런 제안이 나왔다. “민주화라는 용어가 가진 이미지를 특정 목적에 활용하는 경우가 있으니 경제민주화 대신 경제적 평등 추구로 부르자”(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센터 차원의 용어 변경 제안도 있다. 탐욕의 이미지가 서린 자본주의 대신 시장경제를, 사기업 대신 민간 기업이라고 칭하자는 제안이다. 보수와 진보보다는 우파와 좌파가 선입견이 낄 틈이 작은 용어 아니냐는 제안도 한다. 시장점유율 대신 소비자 선택률이란 개념도 꺼내들었다.



 한경연은 대표적인 우파 연구소다. 그래서 반대쪽에선 콧방귀 낄 제안도 있다. 재벌을 대기업집단으로 부르자는 주장은 재벌의 이미지 탈색 목적이 아니냐고 반문을 살 만하다. 그러나 토론회를 이런 이유로 헐뜯을 이유는 없다. 대학가에 다시 나붙은 대자보를 정치색으로 재단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사회통합센터의 현진권 소장은 “우리 사회 복잡한 갈등의 기저에는 바른 용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오는 혼란이 자리하고 있고 이것이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름이, 용어가 무슨 죄가 있으랴. 그러나 이리저리 형성된 이미지는 용어를 사회적 갈등 유발체로 만들었다. 의사의 집단행동을 부르는 영리병원이 대표적이다. 유시민씨는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이런 얘기를 했다. “영리병원의 ‘영’자가 나오는 순간 정상적인 논의가 안 된다. 차라리 이 말을 쓰지 않고 사안별로 접근하는 편이 낫다.” 동감한다. 영리병원에 대한 찬반은 그 자체로 진영이 된다. 진영이 나뉘는 순간 토론은 꼬인다. 드라마는 돈만 밝히는 병원장과 환자만 위하는 주인공 의사의 대립이란 구도를 걸핏하면 쓴다. 영리병원의 ‘말값’은 계속 떨어졌고, 영리병원이란 말은 대화를 위한 객관적 위치를 잃어버렸다. 정부가 고육지책으로 투자개방형 병원이란 용어를 들고 나섰지만 영리병원을 대체하기엔 힘이 달린다.



 한번 의제가 된 용어의 힘은 세다. ‘민영화’ ‘영리병원’이 깃발이 되면 철도가 멈추고, 병원이 문을 닫는다. 그래서 한경연의 노력은 단어 몇 개를 찾아가는 일이 아니다. 갈수록 꼬여가는 문제를 풀기 위한 시작이고, 해석과 성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내년에는 좌파 학자의 참여를 더 늘렸으면 한다. 이게 의사협회장이 공개적으로 자해 시도를 하는 것보다 수백 배 더 힘들지만 수천 배 더 중요한 일이다. 대학가 대자보의 참 의미도 ‘행동하자’가 아니라 ‘생각하자’에 있다고 나는 본다.



 어수선한 연말, 가장 ‘핫’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했다는 말이 계속 귓속을 맴돈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이제는 변혁이 필요한 때다’라고 말했다. 21세기는 거꾸로다. 온갖 새로운 것이 시시각각 등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성찰과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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