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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시간을 붙잡는 느린 우체통

중앙일보 2013.12.20 00:01 Week& 1면 지면보기
1 해발 1340m 강원도 정선 하이원리조트 마운틴탑 전망대에 설치된 `하이원 1340 우체통`. 편지를 부치고 1년 뒤 주인을 찾아가는 1년 느린 우체통이다.


낭만 하면 편지가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편지는 사랑이거나 우정의 다른 말이었다. 한 세대 전의 라디오 세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801호’(MBC 라디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주소)쯤은 달달 외우고 다녔다. 그 시절에는 이맘때 우편함에 쌓인 크리스마스 카드 숫자가 집주인의 인기를 말해주곤 했다.

오늘, 나에게 나를 보냈다



e메일·SMS·SNS 등이 편지를 대체하면서 손편지 주고받던 연말 풍경은 시들해진 지 오래다. 요즘 우편함은 돈에 얽힌 골칫덩이가 대부분이다. 골목마다 깔려 있던 우체통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2007년 2만5000개 이상이었던 전국의 우체통이 올 8월 기준으로 6000개 이상 철거된 상태다. 우체통은 3개월 동안 수집 물량이 없는 경우 철거된다.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도 새로 생기는 우체통이 있다. ‘느린 우체통’이라 불리는 역발상 우체통이다. 신속 배송이 원칙인 일반 우체통과 달리, 느린 우체통의 편지는 1년쯤 뜸을 들인 뒤에야 주인을 찾아간다.



2 부산 초량동 `유치환의 우체통` 기념관을 찾은 관람객이 느린 우체통에 부칠 편지를 쓰고 있다. [사진 부산 동구청]
느린 우체통에 담긴 편지는 신속한 소식 대신에 애틋한 감성을 전달한다. 행복한 순간을 기념하려는 연인, 소망을 담아 수취인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사람, 잊혀져 가는 기억을 붙잡고자 하는 이들이 주로 찾는다. 그들은 뒤뜰에 타임캡슐을 묻는 마음으로 1년 뒤에 열어보는 편지를 부친다.



2009년 5월 영종대교기념관에 처음 생긴 이래, 느린 우체통은 그리움의 정서를 타고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도서관·병원·고속도로휴게소 등 전국 각지에 퍼져 있다. 특히 관광 명소에 많다. 데이트 명소 서울 북악팔각정에도,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5시간 가까이 걸리는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에도, 눈 덮인 스키장 슬로프 꼭대기에도 1년 늦게 배달되는 우체통이 있다. 명소에 추억을 엮으려는 관광지의 빤한 속셈이겠지만, 그래도 여행객에게는 반갑다.



어쩌면 12월은 편지를 쓰기에 가장 좋은 계절일지 모른다. 낯선 곳에서 느린 우체통을 마주치거든 주저 말고 펜을 잡으시라. 느린 우체통이 아니어도 좋다. 동네 어귀에 놓인 빨간 우체통에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 넣어보자. 연말 앞둔 헛헛한 마음을 달래는 가장 편하고도 정다운 방법일 수 있다.



글=백종현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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