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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대통령의 원칙, 관료의 생존 방식

중앙일보 2013.12.18 00:35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하경
논설실장
이달 초 서울시내 한 호텔 식당에 같은 지역 사투리를 쓰는 전·현직 거물급 인사 20여 명이 모였다. TK 출신 전직 장관급의 모임인 대경회(大慶會)의 만찬 자리였다. 박근혜정부의 실세인 김기춘 비서실장과 박준우 정무수석도 외부인사로 초대됐다. 정권의 성공을 기원하는 덕담이 오가는 자리였지만 “대통령 당선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우리 지역이 인사에서 홀대받고 있다”는 푸념도 나왔다.



 대통령의 출신 지역에서 ‘역차별’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명박정부 시절 대통령 고향 사람들이 줄줄이 요직을 꿰찬 것과 대비된다. 사익(私益)을 경계하는 대통령의 소신이 인사에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문제는 따로 있다. 국익을 위해 올인하는 대통령의 결연한 자세와는 딴판으로 관료와 정치꾼들은 제 몫을 챙기기에 분주하다는 점이다. 지금 금융공기업과 협회장 자리는 옛 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인 모피아의 먹잇감이 됐다. 금융계 내부 출신 최고경영자(CEO)와 외부 금융전문가들은 찬밥 신세다. 고시 기수에 따른 상명하복이 체질화된 관료들이 요직을 독점한 금융계에서 창조적 혁신을 꿈꿀 수 있을까. 세계경제포럼(WEF)의 금융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이 148개국 중 81위라는 부끄러운 현실은 대통령의 창조경제 정신을 관치가 훼손한 결과다. 산(産)피아(산업통상자원부), 교(敎)피아(교육부), 감(監)피아(감사원), 국(國)피아(국토교통부)의 적폐도 만만치 않다.



 공기업 인사도 가관이다. 대통령이 지난해 당선 직후 근절을 약속했는데도 낙하산 인사는 전보다 심해졌다. 하기야 집권당 최고위원이 경제부총리에게 대놓고 자기당 원외당원협의회 위원장들을 챙겨달라고 조르는 판이다. 그래서일까. 이 정부의 관료들은 전문성과는 담을 쌓은 무자격의 공신들에게 공기업 개혁의 선도 역할을 맡길 태세다. 낙하산들이 근사한 집무실의 폼 나는 주인이 되려면 출근 저지에 나선 노조에 백기투항해야 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런 낙하산 부대를 집중 투입해 고름이 흘러나오는 환부를 도려내겠다니 기가 막힌다.



 관료들은 이참에 공기업 빚을 줄여 재정 건전성을 높이겠다고 칼을 갈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공공기관 부채 493조원은 국가채무 446조원보다도 많다. 공기업 임직원을 대역죄인 취급하면서, 월급을 깎고 복지를 후려치겠다고 눈을 부라린다. 그런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공무원연금을 손보겠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공무원과 군인에게 지급해야 할 연금 총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공적연금 충당부채는 지난해 기준으로 436조원에 이른다. 1년 새 94조원이나 늘어 국가 채무액에 육박한다. 힘없는 국민이 짊어진 빚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공기업 구조조정을 예고하면서 “이제 파티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관료들의 탐욕스러운 파티는 진행형이다. 잘나가는 전직 관료들은 매달 수백만원의 빵빵한 공무원 연금이 보장돼 있고, 새 직장에서도 거액 연봉을 챙긴다. 힘 없고 빽 없는 불쌍한 국민은 한 달 평균 30만원의 국민연금도 감지덕지일 뿐이다. 이러고도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감히 물을 수 있을까.



 관료들은 대통령 공약에도 물을 타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하는 재주를 부렸다. 국무조정실의 ‘국정과제 신호등’이라는 요술상자에 따르면 140개 과제 중 127개가 ‘당초 계획된 일정대로 큰 문제 없이 추진 중’이다. 4대 중증 질환 무상 진료, 65세 이상 노인 전원 기초연금 20만원 지급, 셋째부터 대학등록금 전액 지급 등 핵심 공약이 예산부족으로 후퇴했는데 경고등은 켜지지 않았다. 파생상품의 높은 리스크를 ‘0’이라고 속여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를 초래한 금융공학 전문가들도 울고 갈 첨단 기법이다.



 원칙의 대통령과 변칙의 관료가 공존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5년 임기가 끝나면 야인(野人)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관료들은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생존해야 한다. 직언이 어려운 것이다. 대통령은 관료의 달콤한 보고서 뒤에 숨겨진 ‘안녕들 하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야 한다. 어느 장관은 매끄러운 보고서가 도저히 담지 못하는 거친 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현장에 별도로 참모를 보내고 있다. 노무현정부 시절 한덕수 총리는 매일 10여 명의 정책수혜자와 통화했다고 한다. 보고서에 가려진 민심을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들이다.



 대통령은 1년 전 대선 이전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관료의 벽을 뚫고 현실과 마주해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박근혜 스타일의 부활을 기대한다.



이하경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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