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가족에게 유독 화 많이 내 사이가 멀어졌다는 가장

중앙일보 2013.12.18 00:05 강남통신 8면 지면보기
Q 회사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적이 없는 사람으로 통합니다. 항상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불합리한 점이 왜 안 보이겠습니까. 하지만 관계 유지라는 명목 아래 ‘내가 불편하고 말지’라며 싫은 소리 안 하고 참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에겐 그러지 못합니다. 잔소리가 심한 데다 웬만한 일도 그냥 넘기질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섭섭해하고 아이들과는 사이가 멀어집니다. 가족에게도 자상하게 대해야지 하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쉽지 않네요. 가족에게 화를 내지 않을 방법이 없을까요.


"밖에선 자상한데 집에선 폭군인 남편, 왜일까요"

A 직장인에게 ‘화를 자주 내느냐’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 ‘아니다’고 답할 겁니다.



독자 여러분, 오늘 하루 내 마음에서 분노가 몇 번이나 치밀었는지 한번 세어 보세요. 언어·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속에서 부글거리며 열 받는 느낌까지 다 세어 보는 겁니다. 의외로 많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윤리와 상식, 법 같은 사회 시스템은 분노를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분노 자체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즉각적인 반응이니까요. 성적 욕구나 공격성 등은 사회 시스템의 통제를 받고 있지만 사실 인류 생존과 직결된 본능입니다. 성적 충동은 사랑의 원동력이고, 공격성은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방어 시스템의 역할을 합니다. 다만 과도하면 타인에게 해를 줄 수 있기에 사회 시스템이 통제를 하는 것뿐이죠.



 최근 분노 조절 프로그램이 유행입니다. 분노를 다루는 대중 심리서도 많고, 회사에서는 적극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직원 교육에 활용합니다. 수렵시대에서는 전쟁이나 사냥에 유리하기 때문에 원초적 공격성이 강한 사람이 출세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화 잘 내는 사람을 반사회적 인물로까지 여깁니다. 출세도 힘듭니다. 여기저기서 반론이 들려오네요. 우리 사장님은 화를 잘 낸다고요. 그럴 수는 있겠지만, 아마 그 사장님도 화 잘 내는 직원은 싫어할 게 분명합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현대인의 화는 수렵시대와 달리 실제적인 생존 위협 때문이 아니라 부당하거나 억울한 느낌이 들 때 납니다. 예를 들어 한 직장인이 A라는 기획안을 올렸는데 위에서 B로 하라고 강하게 지시해 어쩔 수 없이 B를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자 그 책임을 혼자 떠안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억울한 마음이 생기고 분노하게 됩니다. 회사는 사랑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마음 상하는 일이 흔합니다. 어찌 보면 억울한 걸 꾹 참는 대가가 월급에 포함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회사 근처 호프집의 최고 인기 안주는 아마 치킨이 아니라 상사 뒷담화일 겁니다. 그렇게라도 분노를 배출하는 거죠.



 분노라는 감정은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지 않으면 계속 쌓이게 됩니다. 오늘 사연 주신 분도 사회생활에서 쌓인 화가 가정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겁니다. 부부 관계 스트레스로 방문한 많은 아내가 밖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남편이 집에만 오면 폭군으로 변한다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차라리 타고난 성격이 무뚝뚝하면 이해할 텐데, 밖에선 잘하고 집에선 엉망이니 더 참기 어렵습니다. 무시한다는 생각까지 들죠.



 사연 주신 분처럼 관계 유지를 위해 참는 심리는 뭘까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이걸 인지하는 내적 태도 사이에 불일치가 심하면 그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이를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하는데요. 인지 부조화 상황에 빠졌을 때 부조화의 괴로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에 종종 나오는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무언가를 복수하려고 나이 든 남자를 유혹할 때 그 여인은 겉으론 남자를 사랑하는 척하지만 내면은 인지 부조화로 편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실제로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겁니다. 인지 부조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식이 반영된 겁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죠. 모임에서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 나왔지만 분위기상 반대 의견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그 의견의 좋은 점을 찾고는 그 의견이 좋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관계 유지를 위해 참는 것 역시 인지 부조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회생활에서 쌓인 화가 왜 가정에서 터져 나올까요. 아내나 아이들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가정이 따뜻한 곳이기에 솔직한 감정이 나오는 겁니다. 연구 결과 인지 부조화에 따른 지나친 자기 합리화 현상은 보상이 적을 때 더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 매우 지루한 업무를 시킨 뒤 ‘이 일은 아주 재밌다’고 이야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인지 부조화 상태를 만든 거죠. 며칠 후 이에 따른 금전적 보상으로 20만원을 받은 그룹은 ‘재미없다’고 정직하게 이야기했는데, 1000원만 받은 그룹에선 ‘재미있다’고 답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인지 부조화의 대가가 너무 적으니 자기 합리화가 더 강하게 일어난 겁니다.



 현대사회에서 ‘사회성이 좋다’는 말은 사실 ‘인지 부조화를 잘 합리화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문제는 사회성 좋은 사람(well socialized people)이 되는 과정에 화와 분노가 쌓인다는 겁니다. 사람 좋다는 말을 들으려고 별 보상도 없는 회사에서는 더 강박적으로 자신을 합리화하지만 가정에서는 인지 부조화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참지 못하고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상대를 믿기에 분노할 수 있는 건데 이렇게 계속 분노하면 나를 믿어 주는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됩니다.



 가정에서 분노를 줄이려면 회사에서 화를 잘 표현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우호적인 관계에 대해 집착하는 건 상대를 불신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 솔직한 의견과 모습을 보이면 상대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죠.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의견을 소중히 경청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나친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와 맞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해 상대의 반응을 확인해야 합니다.



 분노 조절은 화를 찍어 누르는 것(suppression)이 아니라 잘 표현(expression)할 때 가능합니다. ‘사람 좋아’라는 말 대신 ‘좀 까칠해 보여도 속정이 깊어’ 어떤가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