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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마약과 함께 30년 … 스트레스도 스승이더라

중앙일보 2013.12.17 00:32 종합 25면 지면보기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사건마다 스토리가 있다. 사건 현장에는 결과만 보인다. 스토리는 안 보인다. 국과수는 단서를 통해 그 스토리를 찾아내야 한다. 처음부터 정답을 찍는 게 아니다. 무수한 가능성 중 아닌 것을 하나씩 빼다 보면 마지막 하나가 남는다. 그걸 찾아간다”고 말했다. 그건 어둠에서 빛을 찾고, 빛에서 어둠을 찾는 식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의 삶은 ‘범죄의 재구성’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에서 30년을 보냈다. 화학이 좋아서 약대를 갔고, 일이 흥미로워서 국과수로 갔다. 여성으로선 매우 드문 선택이었다. 지금은 법과학 관련 국제기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다. 12일 대전에서 정희선(58)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을 만났다. 쉽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가 보는 행복은 어떤 걸까.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16) 일하는 기쁨 - 과학수사 전문가 정희선



 정 원장은 마약 전문가에, 독극물 전문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첫 여성소장을 지냈다. 2010년 연구소가 연구원으로 승격되던 해, 초대 원장도 지냈다. “요즘은 여성 파워가 세다. 부검하는 여성 직원도 여러 명”이라고 했다. 그가 국과수로 들어갈 때만 해도 사정은 아주 달랐다.



 정 원장은 78년 숙명여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친구들은 주로 약국이나 제약회사로 갔다. 그의 관심은 엉뚱했다. “대학 3학년 때 국과수 소장님이 와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이 너무 흥미로웠다.” 그때 마음을 뺏겼다.



 그는 국과수 직원이 됐다. 직원 100명을 통틀어 여성은 그를 포함, 고작 3명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묻는다. 국과수도 잘 모르던 시절에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단순했다. 내 마음의 소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택했을 뿐이다.”



 국과수 일은 험하다. 온갖 사건으로 인한 사체를 부검하고 사인을 밝힌다. 화재 현장의 시커먼 잿더미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며칠씩 머물고, 교통사고도 일일이 조사한다. 마약과 독극물, 유전자 검사 등 영역도 다양하다. 잔뜩 기대에 찬 그에게 첫 임무가 떨어졌다. 실험기구를 닦는 일이었다. “국과수에선 부검을 한 뒤에 위장의 내용물을 분석한다. 독이나 약물이 있는지 확인한다. 실험기구 닦고서 8개월간 그 일만 했다. 갈수록 힘이 빠졌다”고 기억했다.



 -왜 힘이 빠졌나.



 “단순한 일만 하니까. 위 내용물이 뭔가. 토사물과 똑같은 거다. 냄새가 온 연구원에 찰 만큼 지독하다. 그걸 갖고 8개월째 분석만 했다. 지치지 않겠나. 뭔가 일다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는 과장실로 찾아갔다. 당돌하게 말했다. “정말 일을 하고 싶다. 뭐든지 시켜달라. 지금 맡은 일만 하고 있으면 내가 이 조직에 유용하지 않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정 원장은 “삶에서 간절함이 올라오는 순간에는 표현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그걸 찾아가야 한다”고 권했다.



 마침 가짜 꿀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꿀에다 설탕도 넣고, 물엿도 섞었다. 감별법이 없었다. 용의자를 붙잡아도 처벌할 수가 없었다. 과장은 그 일을 맡겼다. “밤도 새고 주말에도 일했다. 내 힘으로 뭔가를 해결한다는 게 너무 좋았다. 내가 원해서, 내가 좋아서 했다. 그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굉장했다. 그러니 삶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1년 넘게 온갖 화학 실험을 한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 그때 경찰청 특수대에서 엄청난 양의 가짜 꿀을 만든 사람을 붙잡았다. 그의 방법으로 혐의가 입증됐다. “그때는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 후에 가짜 참기름 파동이 터졌다. 그것도 감별법이 없었다. 3~4년에 걸쳐서 끈질기게 실험을 했다. 결국 해결법을 찾아냈다.



 정 원장은 ‘경험’에 방점을 찍었다. “살다 보니 경험이 참 중요하더라.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처음에는 나무만 보인다.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 나무만 보인다. 그걸 쌓고, 쌓으며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숲이 보이더라. 그러니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소중한가. 거기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그게 쌓여야 숲을 볼 수 있으니까.”



 경찰이 용의자의 신병을 확보하면 48시간이 주어진다.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48시간이 지나면 계속 잡아둘 법적 근거가 없다. 국과수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시간과의 싸움이다.



 “모든 직업에는 스트레스가 있다. 48시간이 처음에는 굉장한 압박이었다. 나중에 알겠더라. 그런 압박을 통해 내가 단련되고, 빨라지고, 성장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때는 몰랐다. 돌아보면 삶의 스트레스가 삶의 자양분이었다.”



 국과수를 11년 다녔을 때다. 영국외무성 장학금을 신청했다. 장학금 대상자를 정하기 위해 면접을 하던 영국외무성 1등 서기관과 영국문화원장이 깜짝 놀랐다. “정말 한국에도 법과학(Forensic science·과학수사)이 있느냐고 묻더라. 또 한국 여자가 그걸 하겠다고 하니까 더 놀라더라.”



 당시 유럽에 비하면 한국 국과수의 수준은 낮았다. 국과수 내부에선 “1년씩 연수를 간 전례가 없다”며 반대도 많았다. 결국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런던대 킹스칼리지에서 박사 후 연수를 했다. “예전에 없던 시도에는 늘 부담이 따른다. 그런 부담이 무섭다면 우리는 새로운 땅을 밟을 수가 없다.”



 그는 영국에서 충격을 받았다. “교통사고를 분석하며 영국은 그때 이미 3D 스캐너를 쓰고 있었다. 교통사고 현장을 3D로 찍어서 입체적으로 재현했다.” 당시 우리는 사고현장 사진만 찍을 때였다. “사건현장에서 피가 튄 패턴을 보고 흉기를 사용한 방향을 분석하더라. 처음 봤다. 그런 충격이 수두룩했다. 가장 중요하게 배운 건 과학수사에 대한 선진시스템이었다.”



 그는 영국에 한국과 법과학 분야의 교류를 제안했다. 영국에서 흔쾌히 응했다. 한 해는 영국 경찰청 등 과학수사 파트에서 한국으로 오고, 다음해는 한국에서 영국으로 갔다. 6년간 그랬다. 그걸 통해 국과수의 과학수사 수준이 업그레이드됐다.



 “처음에는 모방이다. 그걸 통해 따라잡아야 한다. 따라잡은 뒤에는 창의력이다. 그게 승부를 가른다. 과학수사에서 창의력의 토대는 기초과학이다. 그게 탄탄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 수준은 어떤가.



 “유전자, 마약, 영상 분석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특히 유전자 검사는 60억 분의 1을 맞춘다.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래마을 영아 살해사건’ 때는 프랑스 수사기관이 깜짝 놀랐다. 국과수에서 유전자 분석을 해서 프랑스에 보냈다. 그쪽에선 ‘우리가 6개월씩 걸리는 일을 어떻게 한 달 만에 분석했느냐’며 처음에는 무시했다. 나중에 확인이 되자 인정을 하더라. 그만큼 달라졌다.”



 -미국 수사 드라마 CSI를 본 적 있나.



 “몇 차례 봤다. 드라마는 진행이 빠르다. 45분 안에 끝내야 하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저건 아닌데, 저건 아닌데. 눈에 걸리는 게 많으니까 재미가 덜하더라. 실제 사건에는 ‘인간’이 더 절박하게 얽혀 있다.”



 그는 국과수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소장이 됐다. 정 원장은 현재 법과학(과학수사) 관련 국제기관의 양대 산맥인 IAFS(국제법과학회)의 회장이자, IAFT(국제법독성학회)의 차기 회장이다. IAFS 회장을 아시아에서 맡기는 그가 처음이다.



 -큰 조직의 리더를 맡았다. 당신의 리더십, 핵심은 뭔가.



 “배려다. 리더가 앞에서 막 끌고 갈 수도 있다. 나는 좀 다르다. 상대편을 배려하면서 같이 갈 때 더 큰 힘이 나더라. 앞에서 끌고 갈 때 1의 효과가 난다면, 직원들과 한마음이 돼서 갈 때는 2나 3의 효과가 나더라. 나도 직원도 행복할 수 있는 리더십이다.”



 “당신이 보는 행복은 뭔가?”라고 물었다. 정 원장은 “자기 일에 대한 사랑”이라고 답했다. “이게 기초다. 이게 없으면 애를 쓰고, 노력하는 자체가 고통스런 일이다. 이게 있으면 다르다. 좋아서 할 수 있다. 좋으면 나중에 장인이 되고,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자기 일을 사랑할 때 나도 나를 인정하고, 남도 나를 인정하더라. 내겐 그게 행복이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희선 원장=1955년 출생. 숙명여대 약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 IAFS(국제법과학회)의 회장도 맡고 있다.



정희선 원장의 추천서 3권



정희선 원장은 ‘0.1 %의 차이’를 강조했다. 일을 처리할 때 아주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는 것이다. “국과수 직원들에게 늘 강조했다. 0.1의 차이가 100이냐, 아니면 200이냐를 가를 때가 종종 있다. 그건 정성의 차이다. 그런 차이가 큰 결과로 이어질 때가 많다. 100만 해줘도 되는데 좀 더 정성을 쏟아 101을 해주면 된다. 그럼 일의 결과도 달라지고, 사람 관계도 달라진다”고 했다.



◆아웃라이어(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김영사)=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이 책에서는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1만 시간이면 하루 세 시간씩 10년 동안 어떤 일을 꾸준히 해야 한다. 이 정도의 노력 없이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시크릿(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살림Biz)=무엇을 간절하게 원하고, 그것을 향해 마음을 모으면 성취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생각을 책으로 펼쳐낸다는 것이 정말 근사하게 다가온다. ‘정말 가능할까’하는 의구심은 들었지만 아주 흥미로웠다. 긍정적인 생각과 간절함이 일이 성취되게 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디테일의 힘(왕중추 지음, 허유영 옮김, 올림)=중요한 문서에서 오자가 나오면 신뢰성이 푹 떨어진다. 나사못 하나가 잘못되면 기차가 탈선한다. 사소해 보이는 것 하나에도 주의를 집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생한 사례로 보여준다. 1%가 부족해서 전체 프로젝트가 실패할 수도 있고, 1%의 정성으로 200%의 결과를 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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