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재일기] 혐한 에서 매한 까지

중앙일보 2013.12.17 00:10 종합 33면 지면보기
김현기
도쿄 총국장
지난주 도쿄의 한 대형 서점을 둘러보다 눈에 띄는 신간을 발견했다. 책 제목은 ‘매한(<5446>韓)론’. 한자 뜻 그대로 한국을 어리석고 질려버릴 정도로 형편없는 국가로 묘사해 놓았다. “어차피 허접한 엉터리 작가의 글이겠지”란 생각에 저자 프로필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꽤 유명한 통신사의 서울특파원 출신이 아닌가. 올봄 ‘악한(惡韓)론’이란 책을 펴내곤 재미를 보았는지 속편을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발간 1주 만에 아마존 신서(新書) 부문에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어갔다고 한다.



 세계 최대 발행부수(1000만 부)를 자랑하는 일본의 요미우리(讀賣)신문. 이 신문사는 1953년부터 60년에 걸쳐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갤럽과 공동으로 ‘미·일 공동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매년 한두 차례에 걸쳐 상대국 혹은 제3국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한다. 한데 16일자 지면에 실린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올 게 왔구나”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당신은 한국을 신뢰하고 있습니까”란 질문 항목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올 2월의 조사 때까지만 해도 질문 대상국은 미국과 중국뿐이었다. 조사 결과도 ‘예상대로’다. 응답자의 72%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신뢰한다”는 16%에 불과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일본에 군사적 위협이 되는 국가는 어디라고 생각하나”란 질문에 대한 답(복수응답)이었다. 한국은 중국(78%), 북한(74%)에 이어 3위(45%)였다. 2년 전 조사 결과를 찾아보니 한국은 북한(84%), 중국(80%), 러시아(52%)는 물론 중동(26%)에도 뒤진 23%였다. 최근 1~2년 사이에 일본 내의 한국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치솟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굳이 숫자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일본 내에서 도무지 김치가 팔리질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기무치’ 업체가 한류 붐에 편승해 판매량을 늘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요즘은 “반한 분위기로 일본 ‘기무치’업체까지 덩달아 망할 지경”이란 웃지 못할 이야기가 돌 정도다. 한국 학교 부근 점포 중에는 ‘한국 학생 출입금지’를 대놓고 선언한 곳도 있다.



 한국의 당국자나 일반 국민 입장에선 일본 내 혐한 분위기가 별로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아니 “고약한 일본인들!”이라며 더욱 이를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본 내 50만 명이 넘는 한국 교민에겐 이는 이미 생존의 문제다. 혐한(嫌韓·한국을 싫어함)→반한(反韓)→악한→매한의 지경까지 조장하는 일본 사회도 문제지만 이를 방치한 한국 외교당국도 처절한 반성과 개선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김현기 도쿄 총국장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