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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춘「중앙 문예」당선 문학평론|전영태

중앙일보 1973.01.13 00:00 종합 4면 지면보기
그는 이러한 그들을 감정의 흥분을 극도로 억제한 담담한 필치로 서술하여 어떤 역설적인 효과를 느리고 있다. 할머니의 측용을 알리는 전보와 어느 따뜻한 봄날, <깨끗하게 춘복을 차리고 친구들 몇몇과 우이동앵화 구경을 가려는> 「나」와의 대조가 그것이다.

그의 의식은,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앉고『운수 중은 날』(1924) 『불』(동년)『사립정신병원장』(1926) 『고향』(동년) 동 그 당시 사회의 공적 쟁점-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인한 빈곤층과 사회악의 증가, 유랑민 문제등율 다루려는 사회의식으로 확대된다. 즉 그는 자아감정에서 출발하여 가족 감정으로, 거기서 다시 전체이익(Grosse Dinge)을 추구하는 사회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빈곤층과 유랑민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고, 그들을 옹호하고 동정하는 입장에 서있으려고 노력해도. 폐쇄적 형태의 계급규범이 잔존하고 있는 그 당시에 있어서 그와 그들은 교육과 지식으로 구분되는 상이한 계층구조에 있었다.

그는 그들의 문제를 평행적으로 다뤘기 때문에 이광수처럼 높이 존재하는 자로서의 하향적 관점을 지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상의 일면적 측면, 즉 그들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고 민족의 운명적 연대의식을 강조할 줄은 알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속적인 범주에서 탈피하기 위한 개체화의 원리를 주장할 줄은 몰랐다.

다시 말하면 일제가 집단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데 반대하여 비참한 현실의 제양상을 제시하고 증언했지만 그에 대한 거센 항거라든가 개성적인 개체화를 주장하진 못했다. 여기서 개체화란, 「E·프롬」식으로 말하면 속박과 구속에서 탈피하기 위한 자유의 문제고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론적 고뇌이다. 이러한 문제는 그 자신이 속해있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지식인은 환경과 개별과의 중재자이며 개혁과 발전의 선도자이다. 현대 소설이 현실적 인간 이하의 악인을 즐겨 고러면서도 지식인의 문제를 소홀히 다루지 않는 까닭이 이 같은 사실에 있다.

그런데 현진건은 중재자·선도자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을 간과했다. 그의 작품에서 염상섭의『삼대』처럼 당시 지식인의 고민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론『술 권하는 사회』같은 작품에서 그러한 것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한탄하는 경도의 고민은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그는 비극적 현실을 비극적 체험으로 심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의식의 저번 확대를 자기 능력 껏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의 비극적 인식 속에는 지식인인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영원히 고민하고 영원히 투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근거」를 확실히 하려는 인식이 부족했다.

그는 사회나 문학에 대한 대응적 인식은 했지만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각적 인식과 예술적 갈등이 치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장한기교의 천재」라는 찬사를 들으면서도「사건」과 「사람」은 보았지만 「인생」과 「생활」은 못 보았다는 비난을 듣게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할머니의 죽음』같은 기법 적인 역설을 넘어서는 역설적 구현-악이 선을 압도하는 현실에 대한 역설, 계층간의 구조적 갈등. 이중고의 표현이 없었다.

사실, 그가 즐겨 다룬 죽음의 문제도, 사람은 각자 자기자신의 죽음만 죽어야 한다는『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나를 개체화하고 본래의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자아의 실존적 성실에 도달하기 위한 개인적 체험인 것이다. 그런데 현진건은, 자신의 역할을 사적 참여 집단이라고 인식하며 그러면서도 환경의 궁극적 가치의 조정자·재창조자 노릇을 하는 지식인 시련기의 예술가 역할을 완전히 이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 노정된 소극적 수용성, 예술적 갈등의 미흡함을 작품 내용을 이루고 있는 사회 문제의 심각 도나 기법 적인 완숙미로 보충하지 못할 때, 그 작품은 실패작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그 반대 경우의 작품은 기법 면에서 볼 때 한국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작』작품에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2개의 장편소설『무영탑』(l940)과 『적도』(1940)에 대한 언급은 그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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