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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친·성·혜·용', 중국 주변국 외교의 허상

중앙일보 2013.12.09 00:40 종합 34면 지면보기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주변국 외교 좌담회’를 연 것은 지난 10월 24, 25일이었다. 당 정치국원, 국무위원, 외교 관련 고위 인사 등이 대거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주변국과의 외교 지침으로 ‘친(親)·성(誠)·혜(惠)·용(容)’ 등 4개 키워드를 제시했다. ‘친하게, 성심껏, 호혜 원칙에 따라, 넓게 포용한다’는 뜻이다. 뛰어난 외교 노선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수사(修辭)였다. 그는 “중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주변 환경이 필요하고 주변 나라들이 중국의 발전 혜택을 넓게 받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꼭 한 달 뒤인 11월 23일 중국은 이어도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가 포함된 방공식별구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함으로써 동북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후 정세는 ‘친하게, 성심껏, 호혜 원칙에 따라, 넓게 포용한다’는 원칙과는 정반대로 돌아갔다. 한국과 일본이 반발하고 미·중·일 3국의 군함이 몰려들면서 긴장의 파고만 높여놨으니 말이다. 중국 내에서도 ‘그러면 4개 주변국 외교 지침은 뭐가 되느냐?’는 비난이 제기될 정도다. 국가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론화한 노선을 한 달여 만에 ‘구두선(口頭禪)’으로 추락시킨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의 주변국 관계 4원칙은 전제를 하나 깔고 있는 듯싶다. ‘주변국은 절대로 중국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중국은 국가 주권, 영토, 사회 안정 등의 분야에 구체적인 ‘핵심이익(Core interest)’을 설정해 놓고 있다. 티베트든 신장(新疆)이든, 아니면 남중국해든 그들이 정한 핵심 이익을 침해하려는 세력은 응징의 대상이지 친하거나 포용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방공식별구역 문제가 비롯된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이 미국과 추진하고 있는 ‘신형 대국관계’에서도 같은 논리가 엿보인다. 신형 대국관계는 ‘기존 강대국인 미국과 신흥 강대국인 중국이 서로 패권 경쟁 없이 잘 지내자’는 걸 표면에 내걸고 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미국의 글로벌 패권에 도전하지 않을 테니 중국의 핵심 이익을 인정해 달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 ‘신형 대국관계는 중국에 아시아 패권을 통째로 넘겨주는 구도’라는 반발이 제기되는 이유다. ‘중화(中華) DNA의 발로’라는 시각이 제기되기도 한다.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옛 아시아 질서를 현대에 다시 복원하려는 열망이 짙게 깔려 있다는 해석이다.



 베트남·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남중국해 연안 국가들은 중국이 이 지역에도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할 것으로 보고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에 눈길을 돌린다. 일본 보수 정권은 이번 기회를 추가 재무장의 명분으로 삼는다. 한국도 이어도를 포함한 방공식별구역 선포로 맞서고 있다. 중국은 ‘친·성·혜·용’을 제시하며 손짓하지만 주변국은 중국에서 멀어지고 있다. 중국 외교의 한계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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