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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삼성 신경영의 오해와 진실

중앙일보 2013.12.09 00:39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철호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국민을 어떻게 잘살게 하느냐는 생각 외에는 번뇌”라고 했다. 지난주 무역의 날 50주년 행사에서다. 매우 거친 번역일지 몰라도, ‘우리 국민들이 돈 많이 벌도록 하겠다’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역사상 이 땅에서 이 회장만큼 돈 버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통치와 기업경영은 서로 다른 문제다. 하지만 최고 지도자가 어떻게 바람직한 쪽으로 조직을 이끌고 나가느냐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20년에 걸친 이 회장의 신경영은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다. 그 화려한 수치들을 굳이 열거할 생각은 없다. 10년 넘게 ‘가장 닮고 싶은 경영자’로 꼽히는 것 자체가 뛰어난 업적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우리 사회에 각인된 이 회장과 신경영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아닐까 싶다. 우선 1993년 350시간 넘게 펼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열띤 강연이 대표적이다. 95년 불량 휴대전화 15만 대를 불태운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애니콜 신화’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장 유명한 운명적 선택은 반도체를 둘러싼 트렌치(trench) 공법과 스택(stack) 공법의 갈림길이었다. 전문경영인들은 처음 시도하는 스택 공법에 주저했다.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과감한 결심은 이 회장의 몫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삼성이 일본 도시바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과연 이런 빛나는 장면들만 있었을까? 삼성에서 오랫동안 CEO를 지낸 인사들은 고개를 흔든다. “그런 비화들은 밖으로 노출된 1%이고…진짜 비밀은 따로 있다”며 말을 아낀다. 한참을 생각하다 내놓는 비결은 엉뚱하다. “가장 큰 비결은, 일을 안 한 것이지. 회장이 구체적인 경영까지 일일이 개입한 경우는 전혀 없어요.”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돌아보면 이 회장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어….” 인재를 알아보고, 그에 맞는 자리에 앉히고, 자율적인 경영을 통해 최고의 실적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황제경영’이나 ‘관리의 삼성’은 오해인지 모른다. 삼성은 중요 사안을 비서실(현 미래전략실)과 협의하지만 의사결정은 전적으로 사장들의 몫이다. 삼성에서 다른 그룹으로 옮긴 CEO들은 한결같이 “삼성에서 훨씬 자유롭게 일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만큼 삼성 사장단의 권한은 강력하다. 의외로 5~10년씩 장수하는 CEO들도 많다. 삼성전자만 해도 윤종용·진대제·황창규·이기태·최지성 같은 스타들이 배출됐다. 한마디로 까다롭게 발탁하고, 한번 앉히면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이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벤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전차경주다. 멧살라는 사정없이 말을 후려치고, 벤허는 채찍 없이 달린다. 승자는 벤허다.



 박 대통령도 한번쯤 삼성의 신경영을 참고했으면 싶다. 뛰어난 전문가를 내각에 앉히고, 되도록 오랫동안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그 반대의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장관들은 대통령 말씀을 수첩에 받아 적기 바빴다. 내각보다 청와대가 훨씬 많이 전면에 등장했다. 어느 조직에서도 오너가 주도하면 전문경영인은 설 자리가 없다.



 중국 자금성의 교태전에는 ‘무위(無爲)’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옛 고전의 ‘무위이치(無爲而治)’에서 따왔다. 청나라의 건륭제가 스스로를 경계하며 옥좌 위쪽에 직접 써놓은 글귀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세상이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정치적 이상향의 극치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얼마나 ‘무위’를 마음에 새겼을까.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으로 만날 맨앞에서 지도해온 게 아니었을까. ‘대통령 중심제’가 ‘대통령 선도제(先導制)’와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한번쯤 반걸음 물러나 조용히 지켜보면 어떨까 싶다. 스스로 권력을 자제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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