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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아시아 패러독스와 베·세·토·하대학

중앙일보 2013.12.09 00:37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너무나 잘나가던 행진이 벼랑 끝에 선 격이 되었다.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고도성장의 표본같이 치켜세워지며 21세기에는 세계의 중심지역이 되리라고 지목되었던 동아시아의 위상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잘나가던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파열음이 원인이다. 천재지변이나 교역, 관광수입 등이 줄어서 생긴 것이 아닌 이웃나라들 간의 정치, 안보 갈등의 고조로 인해 생겨난 결과다. 지난 일주일 동아시아 하늘엔 전운이 감도는 불길한 징조까지 나타났다. 동아시아의 고속발전을 시샘하는 ‘성공의 저주’라는 덫에 걸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동아시아 국가들이 제각기 자존심 회복, 고도성장, 국력증강에 몰두했던 나머지 함께 넘어야 할 역사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다. 19세기부터 서구열강이 주도했던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갖가지 수모를 겪어왔다. 그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동서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국가체제를 시동시키는 혹독한 시련을 경험했다. 그렇듯 우여곡절 속에서 오늘의 위치를 확보한 동아시아 국가들이지만 스스로의 자주적인 비전으로 지역 내 평화로운 이웃관계를 보장하는 새 질서를 마련하지 못한 채 그 공백 속에서 전환기의 혼란을 맞게 된 것이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차원에서 힘의 균형이 바뀌는 역사의 전환기에는 불안심리가 만연하고 국제관계가 불안정의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이러한 전환기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객관적 사고와 장기적 안목으로 이웃국가들이 공존, 공영할 수 있는 새 틀과 전략을 고안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누가 그러한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는 데 앞장서야 되겠는가. 목전의 이익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정치권이나 기업에 그 역할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사고(思考)를 본연의 자세로 삼는 대학사회에 그 시동을 기대해 본다.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관계가 긴장상태로 빠져든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네 국립대학인 베이징대·서울대·도쿄대·하노이대 베·세·토·하(BESETOHA) 총장포럼의 연차모임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네 대학 총장들은 한결같이 아시아의 미래를 위한 공동체 정신의 함양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국가 상호간의 이해부족에 대한 아쉬움과 반성을 토로했다. 지리적 근접성이 자동적으로 상호이해를 수반하지는 못한다는 것, 오히려 오해와 불신을 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먼 유럽이나 중동 국가들에 대한 이해는 촉진된 반면 바로 이웃나라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물리학자인 베이징대 왕엔게 총장은 이러한 상호 이해부족에 대한 대학의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오연천 서울대 총장은 동아시아 사회의 이웃나라에 대한 이해도가 세계 수준에서 어떻게 평가될지 자성할 때가 왔음을 강조했다.

 ‘아시아의 아시아화’란 표현을 사용하며 하마다 준이치 도쿄대 총장은 아시아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 지역 내에서의 아시아 연구의 진흥을 위해서는 국제공용어인 영어 못지않게 아시아권의 언어 교육이 절실하며, 일례로 일본 연구가 일본학자의 연구에 더해 외국인, 특히 아시아 학자들의 심도 있는 연구와 적절히 종합될 때 보다 높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풍샨냐 하노이대 총장은 동아시아 사회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이해하는 지름길인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학생의 지속적 증가, 대학 간의 학점교환, 국경을 넘은 온라인 강의, 아시아 대학 평가기준 합의 등, 연구와 인재양성이란 대학 본연의 임무를 상의하는 총장들의 모습에서 답답하게 꼬여 있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한 가닥 가능성과 동력을 엿볼 수 있었다.

 뒤늦게나마 동아시아 공동체로 향한 구체적 행보를 시작할 때가 왔다. 이것은 우리 아시아인 자존심의 시험이기도 하다. 편협한 복고심리나 내셔널리즘에 더 이상 얽매일 수는 없다. 매스컴의 시대에 대중의 참여가 수반하는 감정적 교조성에 포로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 아시아인의 정서와 규범에 걸맞은 ‘호혜평등’의 원칙을 정립해 아시아를 21세기 지구촌의 중심지역으로 만들어 가야 될 것이다. 지난 며칠 우리 이웃에서 겪고 있는 갈등과 불안은 바로 그러한 아시아의 제자리 찾기를 위한 진통이라고 믿어보자.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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