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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또 걸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중앙선데이 2013.12.07 16:40 352호 6면 지면보기
들국화의 새 앨범은 지난날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든 습자지 같다. 신곡 다섯 곡 중 네 곡의 가사를 쓴 전인권은 시적인 언어로 영욕과 재활의 시간 동안 느꼈을 극단적 감정의 고갱이들을 그려낸다. 때로 비틀거리며, 때로 웅얼거리며, 때로는 포효하며 문장을 노래로 승화시킨다. 트렌드란 게 다 뭐냐는 듯이, 1985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가슴 벅찬 애잔함을 그대로 유지하며 21세기에 맞는 소리로 우리에게 인생과 음악에 대한 묵직하고 또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27년 만에 새 앨범 낸 ‘들국화’

선 공개된 ‘걷고, 걷고’는 제목 그대로 아침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의 발걸음 같다. 최초로 전인권과 최성원이 작사와 작곡을 분담한 ‘노래여 잠에서 깨라’는 요즘에도 보기 드문, 구성의 묘를 살리는 곡이다. 16년 만에 다시 뭉친 그들의 음악이 굳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를 타고 민들레 홀씨처럼 날린다. 주찬권의 유작이 된 ‘하나둘씩 떨어져’는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였던 80년대의 정서를 고스란히 유지한다. 지극히 단순한 흐름에 얹히는 기나긴 독백에 전율하게 되는 ‘재채기’, 최성원의 미성을 오랜만에 들을 수 있는 ‘들국화로 필래’까지 신곡의 수가 많지는 않되, 며칠이면 사라지는 음원의 시대에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정성이 담겨 있다. 이 외에도 조동진과 김민기의 리메이크, 그들이 즐겨 불렀던 팝송 리메이크가 한 장의 CD에 실렸다. 들국화 1, 2집과 멤버들의 솔로 앨범에서 추려낸 12곡을 다시 불러 또 한 장의 CD를 채웠다.

음악계에 들국화가 재결성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건 2010년이다. 1집의 녹음만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던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귀국해 다시 음악을 시작했고 전인권과 의기투합했다(그는 결국 재결성에는 동참하지 못했다). 최성원과 주찬권도 뜻을 모았다. 오랫동안 황폐한 몸과 마음으로 지냈던 전인권은 필사에 가까운 재활을 시작했다. 그런 소식을 들은 이들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응원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으로 장엄한 부활을 알렸다. 작년 봄, 대학로에서 열렸던 콘서트 무대였다. 그리고 여름에는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첫날 서브스테이지의 헤드라이너였다. 공연이 시작되고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 가슴을 파고 드는 명곡들이 펼쳐졌다. 전인권은 모든 노래를 직접 불렀다. 2000년대 초반 고음부에서 객석으로 마이크를 넘기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그런 전인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베이스를 연주하던 최성원은 말했다. “여러분, 전인권이 돌아왔습니다.”

그 모습에 가슴 벅차한 건 일반 관객들뿐만이 아니었다. 들국화의 팬으로서 이 공연을 지켜보던 이적·장기하 등의 뮤지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SNS를 통해 전설의 귀환에 감격해 했다.

녹음이 시작됐다. 장장 5개월. 전인권은 보컬 녹음을 하는 기간 종종 스튜디오를 떠났다. 노래에 필요한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대를 일부러 망가뜨렸다가 노래하는 일도 있었다. 각각의 노래에 맞는 목소리를 그렇게 갖춘 후 스튜디오에 돌아왔다. 한 곡의 보컬을 녹음하는 데 든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들국화는 준비했고, 대중은 기다렸다. 그들의 음악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기성 세대가 되어 들국화의 컴백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0월 20일, 주찬권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컴백을 두 달도 채 안 남기고. 남은 두 멤버는 공연·인터뷰 등 새 앨범과 관련된 활동은 없을 거라고 밝혔다. 고인을 갑자기 잃은 데에 대한 충격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야생의 들국화 사진이 있는 앨범 커버는 단조로운 흑백이다. 고인에 대한 추모라 느껴진다. 무례를 무릅쓰고 바란다. 부디, 마음을 추스른 후 이 멋진 새 노래들을 공연장에서 불러 줬으면 한다. 1985년, 일체의 방송활동 없이 오직 공연으로 세상을 바꿨던 들국화의 힘을 생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들국화의, 우리의 진정한 아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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