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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 용기와 화해 95년

중앙일보 2013.12.07 00:55 종합 14면 지면보기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 곳곳에서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사진은 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시민들이 만델라를 애도하기 위해 의사당 근처에 있는 만델라 동상 앞에 갖다 놓은 꽃과 사진. [런던 로이터=뉴스1]


넬슨 만델라(왼쪽)가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활짝 웃고 있다. 오른쪽은 공동 수상자인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 당시 대통령. [AP=뉴시스]
“내가 언제 정치화됐느냐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때부터 정치화되는 것을 의미한다.”(넬슨 만델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보통 사람' 꿈꾸던 식민지 청년 … 모욕·차별에 투쟁 한복판으로
27년 투옥 뒤 세속의 성자로 … 그가 인류의 품격을 높였다



 5일(현지시간)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삶을 온전히 ‘자유 투쟁’에 바쳤다. 처음에는 백인의 인종 차별에 억압받는 흑인으로서 인권 투쟁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정책) 철폐를 이끌어낸 후엔 사회 통합에 투신했다. 흑인들이 증오와 원한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이끌었다.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마친 뒤에는 에이즈 퇴치에 헌신했다. 투사로서, 자유인으로서, 세속의 성자(聖者)로서 그는 인류의 품격과 양심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



 만델라는 1918년 영국 식민 통치 아래 남아프리카 트란스케이 주 작은 마을에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식민지 해방의 논의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원래 이름 ‘롤릴라’는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녔다.



 대학 진학 때까지의 목표는 교육받은 흑인으로서 ‘검은 영국인’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변화하는 세계 정세는 식민지 아프리카의 다른 미래를 그려보게 했다. 1940년대 초 그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법률상담소를 여는 한편 ANC 집회에 참여하면서 정치의식을 길렀다.



 “특별한 깨달음이나 계기보다 수많은 모욕과 냉대가 쌓였고 어느 날 투쟁 한복판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회고처럼 흑인만의 병원에서 태어나 흑인 버스를 타고 흑인 학교로 통학하며 통행증을 제시해야 하는 삶, 그 자체가 이유라면 이유였다. 변호사 만델라는 44년 ANC 청년동맹을 주도적으로 결성했다.



 56년 국가반역죄로 처음 투옥됐다.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이 되면 자가용 기사, 요리사, 웨이터 등으로 위장해 활동했다. 이때까지도 ANC를 중심으로 한 평화시위에 주력했다.



 60년 3월 백인 정권의 인종 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69명이 숨졌다. 이른바 ‘샤퍼빌 학살’이다. 만델라는 이를 계기로 비폭력 평화활동을 주장하는 ANC에 반기를 들었다. 피델 카스트로, 마오쩌둥, 체 게바라의 저작을 읽고 무장투쟁에 대한 전략을 가다듬었다. 그는 61년 MK라는 무장조직을 설립해 테러활동에 나섰다. 체포와 석방이 반복됐다.



 64년 46세의 만델라는 국가 반역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몸은 외딴 로벤 섬 교도소에 갇혔지만 그의 정신까지 가둘 순 없었다.



 “독방 감금과 살해 위협 등에 굴하지 않고 내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수형생활을 성숙과 단련의 기회로 여긴 낙천성 덕분이다.” “인간성에 대한 나의 신념이 혹독한 시련을 겪는 어두운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굴복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곧 패배와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절망하는 대신 사색하고 운동했다. 열악한 수형 환경을 투쟁으로 개선시켰고, 교도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로벤 섬을 정치범들의 대학으로 바꿔놓았다. 옥중에서 자와할랄 네루상(79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81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83년)을 받았다. 85년 시사주간 타임은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는 86년 남아공에 경제제재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만델라 석방 압력을 넣었다.



 90년 2월 만델라는 감방 문을 나섰다. “비록 일흔한 살이지만 내 인생이 이제 막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시작은 또 다른 폭력투쟁이 아니라 중재하고 화합하는 삶이었다. “백인 역시 남아공 사람이다. 그들이 국가에 바친 헌신을 우리가 높이 평가한다는 점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의 석방 소감은 남아공 분열 치유의 디딤돌을 놓게 했다. 91년 7월 ANC 의장으로 선출된 만델라는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이끄는 백인 정부와 분쟁 종식 협상을 벌였다. ANC 합법화, 인종차별법 폐지, 범국민 개헌협상회의인 민주남아공회의 개최 등이 합의됐다. 아파르트헤이트 법적 채택으로부터 46년, 서구 제국주의의 남아프리카 침탈로부터 따지면 350여 년에 걸친 인종 분규가 막을 내렸다. 이 공로로 만델라는 93년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만델라는 94년 5월 사상 첫 흑인 참여 자유총선거로 구성된 다인종 의회에서 첫 흑인 대통령에 선출됐다. 취임 후에도 사회통합 행보는 계속됐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과거의 인권유린을 밝혀내고도 보복 대신 사면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전 세계를 다니며 남아공 투자 독려를 호소하기도 했다. 95년 첫 내한 때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며 “한국의 경제성장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2001년 내한 땐 그의 자서전을 번역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만나기도 했다.



 99년 퇴임 후엔 ‘넬슨 만델라 재단’ 등 자선단체를 통해 사회 헌신을 이어갔다. 만델라의 수형번호 ‘46664’는 2005년 에이즈 퇴치 콘서트 이름으로 쓰이는 등 다양한 자선 브랜드로 활용되고 있다.



 만델라는 27년간의 수형 생활 동안 얻은 폐질환으로 오랫동안 투병했다. 지난해 말에도 폐 감염으로 입원해 3주간 생사를 오갔다. 최근 7개월 새 네 번이나 입원하면서 5100만 남아공 국민이 그의 쾌유를 기원했다. 지난 9월 퇴원한 뒤 요하네스버그 저택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만델라의 일생은 여러 차례 영화와 오페라 등으로 만들어졌다. 2009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 ‘인빅터스’에선 할리우드 배우 모건 프리먼이 만델라 역을 맡았다. 현재 TV 미니시리즈 ‘마디바(Madiba)’가 영국 제작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마디바는 만델라의 출신 부족인 남아프리카 코사족 언어로 ‘존경받는 어른’이라는 뜻이다. 남아공에선 마디바를 만델라에 대한 존칭으로 쓴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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