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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문자와 동학, 근대 시민을 깨우다

중앙일보 2013.12.07 00:27 종합 23면 지면보기
19세기 말 벽보를 읽는 사람들의 모습. 송호근 교수는 대화와 토론, 합의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의 출현이 근대 한국의 밑바탕이 됐다고 말한다. [중앙포토]


시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민음사, 521쪽, 3만원




한국에서 근대국가와 근대사회, 그리고 근대인은 언제 출현했는가.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가 화두로 삼은 물음이다. 서양의 근대가 뚜렷하고 분명한 모습을 띠고 있기에 그 기원과 진화 양상을 충분히 재구성해볼 수 있지만 한국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한국의 근대는 그 기원과 진화의 궤적이 모호하다. 한국 현대사회의 특질에 대한 분석에 몰두해온 사회학자로서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이 기원의 문제에 항상 갈증을 느껴왔다는 그가 결국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물론 근대의 기점과 성격에 관한 연구가 없지 않았다. 아니 한국사 연구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과문하지만 상식에 기대보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함께 비로소 서양식 근대가 이식됐다고 보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쪽에 있다. 반면 다른 쪽엔 18세기에 이미 토지 소유관계의 변화와 함께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텄다고 보는 자생적 근대화론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성격을 띠며, 자생적 근대화론에 따르면 일본의 지배는 우리의 자생적 근대화의 길을 차단하고 굴절시킨 혐의를 피할 수 없다. 그 외에 근대라는 역사적 범주가 서양사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한국사의 특수성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일반적 틀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근대 회의론도 있다.



 입장은 다르지만 근대의 핵심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국민국가라는 정치체제의 결합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자본주의 근대로 나갈 수 있는 역량을 일제의 강점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주된 쟁점이었다.



 하지만 전작인 『인민의 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송 교수는 ‘공론장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채택한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관한 하버마스에 선구적 연구에 기대어 저자는 공론장의 분석을 아예 조선의 전반적 역사 변동과정을 설명하는 통시적 분석틀로 삼는다. 책의 부제가 ‘조선의 근대와 공론장의 지각 변동’으로 붙여진 이유다. 저자는 “조선의 역사 변동은 공론장 구조 변동의 역사”라고까지 말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은 한 시대가 저물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대가 다가오는 전환기였다. 이 전환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말안장 시대’(1860~94)다. 1860년대 전국 각지에서 봉건 질서와 지배층에 반기를 든 민란의 시대가 도래했고, 저자의 표현으로 문자해독력을 갖춘 ‘문해인민’(文解人民)은 주체의식과 존재론적 자각을 갖게 된 ‘자각인민’으로 진화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건 양반 공론장의 쇠퇴와 평민 공론장의 확대다.



 19세기 전반기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을 지탱해온 지식과 권력의 선순환이 차단되고 차츰 서양의 위협과 직면하면서 더 이상 성리학적 천(天) 개념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문명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천 개념의 변용이 불가피했지만, 지배층이 내세운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동도서기(東道西器), 문명개화 등의 세 가지 태도는 여전히 ‘지배층의 천’만을 고려한 것 일뿐 ‘인민의 천’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인민의 천은 동학에서 새로운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데, 동학은 인민도 스스로 천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매우 파격적인 ‘종교 개혁’이었다. 이렇듯 지배층의 천과 인민의 천이 분리되면서 역사 또한 지배층의 역사와 인민의 역사로 분리되며, 이 두 역사는 1894년에 서로 충돌하면서 모두의 실패로 끝난다.



 말안장 시대에 이어지는 시대가 갑오정권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근대 이행기이다. 공론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기는 지식인 공론장이 형성되고, 평민 공론장이 세속적 평민 공론장으로 부활하며, 이 두 공론장이 서로 연대하고 공명한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가 제대로 추진됐다면 개인은 시민으로, 사회는 시민사회로 자연스레 이행해갈 수 있었을 터이지만, 불행히도 국권 침탈과 함께 그 과정은 중단됐다. 그 결과 시민의 탄생은 “식민 통치하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상상력의 공간, 문학의 영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시민의 탄생』은 자각인민이 근대적 개인을 거쳐 시민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근대적 개인과 시민을 구분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근대적 개인이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라면 저자는 개인과 사회가 근대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은 시민으로 발전한다고 본다.



 이러한 접근 시각과 용어들이 ‘송호근판’ 한국 근대 기원론의 강점이다. 저자는 한편으로 공론장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한국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조망을 제시하며, 다른 한편으론 공론장의 구조 변동에 대응하여 인민이 어떠한 주체로 진화해가는가를 단계별로 기술한다. 전례 없는 시도이자, 한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안목과 이해를 획기적으로 넓혀주는 중요한 성과로 읽힌다.



로쟈(본명 이현우) 북칼럼니스트



●로쟈 서울대 노문학과 졸업(석·박사). 한림대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책과 책읽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2000년부터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를 운영해오고 있다. 로쟈는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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