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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미 역사학자의 죽비 "정치인에 속지 마라"

중앙일보 2013.12.07 00:15 종합 24면 지면보기
미국의 진보 역사학자 하워드 진(1922~2010)은 시민의 권리를 찾기 위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고 있는 하워드 진. [사진 오월의봄]


역사를 기억하라

하워드 진 지음

앤서니 아노브 엮음

윤태준 옮김, 오월의봄

463쪽, 1만7000원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1963년부터 2009년까지 했던 강연 원고를 묶은 책이다. 하워드 진은 뉴욕 빈민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27세 나이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 흑인만 다니는 스펠만대학 역사학 교수로 부임한 후, 거기서 학생들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폭격수로 참전했던 그는 한때 철없이 원폭을 환영하기도 했지만, 히로시마의 참상을 알게 된 후 전쟁에 깊은 환멸을 품고, 베트남 전쟁은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등 미국이 벌인 모든 전쟁에 반대하게 된다. 반전에 대한 그의 신념은 미국인의 세 가지 성전(聖戰), 즉 독립전쟁·남북전쟁·2차대전마저 가만 두지 않는다. 그는 ‘선한 전쟁’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의심한다.



 그는 평생을 아스팔트 위의 투사들과 함께 했다. 제도정치나 사법제도의 밖에서 ‘시민불복종’을 강조한다. 미국의 정치구조가 “투표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아름답고 훌륭한 제도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부나 정치가들이 먼저 나서서 정의가 실현되고 불의가 바로잡히는 일은 없다” “그들은 그저 사회운동의 힘에 반응할 뿐”이라고 말한다.



 인상적인 건 미국의 건국신화를 해체하는 대목이다. 독립전쟁에서 돌아온 민중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건국의 아버지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들은 그저 독립전쟁에서 함께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재산을 나눠 가지려 한다.” 링컨의 관심사는 노예해방이 아니었다. 노예해방은 남군에 가담한 주들에만 적용될 뿐, 북군을 지지하는 주에서는 노예의 소유가 용인됐다.



 헌법도 그의 비판을 피해가지 못한다. 미국의 건국헌법은 애초에 극소수 백인 노예소유주의 이해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헌법은 거의 모든 실제세계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할 거의 모든 상황에서 당신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표현의 자유는 스스로 쟁취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헌법은 민중의 저항으로 만인의 평등을 보장하도록 거기에 몇 차례 수정이 가해진 결과로 탄생한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참전 군인들의 시위 모습. [사진 오월의봄]
 미국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연상시킨다. 도청 사실이 폭로됐을 때,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보좌관이 나눈 대화란다. “어떻게 하지? 젠장.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야?” “국가안보 문제라고 말씀하십시오.”



국정원은 지금 댓글공작이 국가안보라고 강변하고 있다. 미국에도 내란음모 사건이 있었다. “검찰이 어떤 증거물을 가져왔을까요? 총과 폭탄, 다이너마이트 뇌관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책이었습니다.”



 그는 오바마를 향해 “자신을 사령관이 아닌 공동체 조직자(community organizer)로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이 말을 그대로 청와대에 전하고 싶다. 그 반대편의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말도 있다. “상황을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운동은 남들에게 속지 않는 것만큼이나 우리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행동 없는 진보를 비판한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급진적 변화를 말하는 이론가들은 제 안전만을 추구하는 가장 세련된 기술을 솔선수범하여 가르치는 셈입니다.” 보수적 지식인들의 허위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는다. 하워드 진에 따르면,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은 베트남 난민이 미군의 폭격에 쫓겨 사이공으로 피난하는 것을 ‘도시화’라 불렀다고 한다.



『역사를 기억하라』저자 하워드 진.
 알베르 카뮈의 말대로 “전염병과 환자로 나뉜 세상에서 전염병 편에 서지 않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는 의무”다. 그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영웅적 행동이나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이 각자 제 영역에서 작은 행동을 하면, 역사의 어느 시점에선가 그 작은 행동들이 하나로 뭉쳐져, 거대한 사회운동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믿음 하나로 살아왔던 하워드 진은 2010년 1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저항의 행동을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선동적’이다. 하지만 그의 수사는 과격하지 않고, 논리는 비약하지 않는다. 비슷한 계기에 여러 장소에서 했던 강연을 모아놓은 것이라, 더러 중복되는 내용이 있으나 읽는 데에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같은 에피소드라도 다른 맥락에 배치돼, 다른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책은 사망하기 두 달 전의 강연으로 끝난다. 마지막 강연의 마지막 문단은 마치 그의 유언처럼 들린다.



“권력의 꼭대기에 앉은 사람들의 힘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복종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복종하기를 그만 두면 권력을 쥔 자들도 힘을 잃습니다. (…) 민중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조직하기 시작하면요. 저항하면요. 충분히 강력한 운동을 형성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의 전부입니다. 감사합니다.”



진중권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생각의 지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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