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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국회 오판이 부른 '배상 쓰나미'

중앙일보 2013.12.06 01:34 종합 8면 지면보기
1977년 4월 광주 YMCA 회관. 강당에 모인 150여 명의 회원 앞으로 대학생 조모(당시 24세)씨가 나타났다. 그는 유신을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하는 유인물 50여 장 가운데 10여 장을 나눠주다 체포됐다.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법원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고 299일간 옥살이를 하다 석방됐다.


[예산으로 갚는 과거사 연 1340억 … 그후 7개월]
줄잇는 과거사 손배소 … 한국전쟁 1조347억, 긴급조치 3090억



 조씨는 지난해 대법원이 유신 시절에 내려진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하자 법원에 재심을 신청해 형사상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를 근거로 손해배상을 신청했다. 동료 3명, 이들의 가족 등 26명이 청구한 금액은 48억4200만원.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19부(부장 오재성)는 지난달 8일 조씨 사건을 비롯해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소송 7건에 대해 화해권고를 했다. 국가가 전액 물어주라는 취지였다. 국가배상 소송을 담당하는 서울고검 관계자는 “사실관계와 적절한 배상 규모를 따지지도 않고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화해권고에 응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긴급조치 배상 사건들이 폭주하고 있다.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금됐던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뒤 대거 손해배상 소송을 내면서다. ‘제2의 국가배상 쓰나미’라는 말까지 나온다. 인혁당을 포함한 각종 간첩단 조작 사건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소송에 이은 초대형 국가배상 사건이라는 측면에서다.



 대법원 집계에 따르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은 총 589건, 1100명에 이른다. 이 중 225명이 이미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또 무죄 확정판결을 근거로 국가를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소송은 모두 173건이고 청구 배상금은 3090억원에 달한다. 검찰 관계자는 “재심 대상자들이 모두 소송을 낼 경우 소가는 2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단 간첩단 사건 관련 소송은 대부분 마무리됐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들은 절반가량 종결되고 나머지는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말 기준으로 서울고검 관할 법원에서만 530건의 관련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소송에 참여한 원고는 2만3574명(피해자 가족 포함), 청구금액은 모두 1조347억원으로 집계된다.



 이에 따라 2000년대 활동한 과거사위원회를 한 번 더 가동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19대 국회 들어 올 1월까지 발의된 과거사 정리 법안만 20건이다. 이후 과거사 정리를 위한 진실화해위 활동을 2~4년 늘리자는 법안이 3건 더 발의됐다.



 사건이 많고 사안이 방대하다 보니 과거사 피해 보상 여부를 법정에서 가리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외국의 경우 과거 공권력에 의한 피해는 정부가 사과하고 재단이나 기금을 만들어 일괄적으로 배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치의 피해가 컸던 독일, 군부통치를 경험한 남미의 아르헨티나·칠레 등이 그랬다. 국내에서는 1990년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법’이 대표적이다. 이 법에 따라 지금까지 4600여 명에게 2000억원가량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하지만 과거사 정리작업의 결정판이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는 배상 관련 내용이 빠졌다. 처음에는 정부도 위원회 차원의 일률적 배상을 검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8·15 경축사에서 “국가가 앞장서 진상을 밝히고 배상이나 보상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모든 사건 피해자에게 보상하면 나라가 거덜 날 것”이라며 기본법에 따른 배상을 포기했다.



 이 때문에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받은 피해자들이 법원으로 몰려들었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지출은 더 늘어났다. 법원이 통상적인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 방식으로 재판을 하다 보니 일부 피해자에게 수십억원씩 물어주라는 판결을 내리면서다. 나중에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나서 판례를 변경했지만, 초기에는 이자만 100억원이 넘는 사건도 있었다.



 사법적 안정성이 깨졌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서울고검 최창호 검사는 “수십 년 전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이제 와서 인정할 경우 시효가 지난 다른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이라도 국회가 이 문제를 입법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대구지법 11민사부 권순탁 부장판사는 지난해 말 경북 칠곡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 96명이 낸 소송을 기각하면서 “이미 역사가 된 과거를 현재 가치관으로 평가하는 것은 사법만능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국회에는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을 규정하는 법률이 여러 건 계류 중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의원 시절 마지막으로 발의에 참여한 ‘긴급조치 피해자 보상법안’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26일 발의된 이 법안은 1년 동안 심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그사이 피해자들이 낸 소송은 판결을 앞두고 있다.



최현철·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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