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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겨울, 수북이 쌓인 귤과 만화 …

중앙일보 2013.11.29 00:32 종합 32면 지면보기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이번 주의 취향은 진정 사소하다. 주말 홍대 근처 만화전문 서점에서 신간을 고르다 제목 없는 작품을 발견했다. 작가는 다케모토 유지(竹本友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표지 한가운데 ‘8’이라고 쓰여 있기에 점원에게 물었다. “1권은 어디 있나요?” “그게 1권인데요.” ‘여덟(8)’은 만화의 제목, 겉표지에는 미소된장국이 그려져 있다. 『심야식당』풍의 따뜻한 음식만화가 아닐까 하는 기대로 구입을 결정.



 아뿔싸. 첫 이야기부터 심상치 않다. 음식이 아니라 인간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전자레인지가 등장한다. “귀찮아” “관심 없어”를 입에 달고 사는 메마른 영혼들이 ‘인간 전자레인지’에 들어갔다 나오면 “태어나길 잘했어!” “당신을 만난 건 기적이야!”를 외치는 뜨거운 인간으로 변모한다는 내용이다. 사람과 애완견이 뒤바뀐 세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인간의 영혼을 지닌 휴대전화가 나온다면 등 황당하게 시작해 허무하게 웃기는 이야기들이 담겼다. 정작 음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만화였다. 제목이 ‘여덟(8)’인 것은 모든 에피소드가 8페이지로 끝나기 때문이라는데, 별로 설득력 없는 설명이다.



만화 『여덟(8)』 1권 표지. [사진 시공사]
 ‘기-승-전-병’으로 진행되는 ‘병맛(맥락 없고 황당하게 웃기는 이야기를 일컫는 인터넷 용어) 코드’지만 일상을 비트는 기발함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스물다섯에 전업을 하게 된 작가는 회사에서 수많은 아저씨를 겪었던 모양이다. ‘아저씨 등급’이라는 에피소드는 ‘누가 더 아저씨스러운가’를 가리는 시험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보다 높은 아저씨 등급을 획득하기 위해 코털을 기르고, 재킷을 바지 안에 집어넣고, 썰렁개그를 연마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비장의 무기 ‘성인병’으로 11단 획득을 노리는 아저씨가 외친다. “어떤 시대에도 나라를 지탱하고 발전시킨 사람들은 아저씨였다. 그런데 언제나 냄새 나고 더럽다며 박해를 받아온 슬픈 인종이지.”



 투명인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불투명인간의 애환, 폭언 알레르기가 창궐해 누구나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세상 등 현실과 판타지, 유머와 페이소스를 자유롭게 오가는 감각이 놀랍다. 오랜만에 이 만화 덕분에 큭큭 실소하다 푸하하 웃었다. 달력은 한 장 남았고 세상은 시끄럽고,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는 분들께 조심스레 권해본다. 그러고 보니 ‘만화의 계절’ 겨울이 시작됐다. 따뜻한 전기장판과 이불, 수북이 쌓인 귤과 만화책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비장의 4단 콤보가 아니었던가. 이번 주의 취향, 이렇게 마무리마저 사소하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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