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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로 덮어버린 역사왜곡 … 만화적 로맨스만 되풀이

중앙일보 2013.11.21 00:25 종합 25면 지면보기
실존 인물 기황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역사적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로맨스 판타지 사극 ‘기황후’의 주인공들. 왼쪽부터 원나라 황제 타환(지창욱), 공녀 출신으로 황후에 오르는 기승냥(하지원), 약소국의 울분을 온몸으로 겪는 고려 유왕(주진모). [사진 MBC]
사극이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무한 허구의 영역도 아니다.


드라마 썰전(舌戰) ⑬ MBC '기황후'

페이스북 ‘드라마의 모든 것’팀이 진행하는 드라마썰전(舌戰) 13회 주제로 MBC 판타지사극 ‘기황후’를 선정했다. 고려시대 공녀로 끌려갔다가 원의 황후가 된 기황후를 처음으로 주인공 삼은 드라마다. 기황후는 이후 오빠 기철 등과 함께 고려 내정을 심하게 간섭해 악녀 이미지가 강하다. 이를 둘러싸고 방송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이 거셌다. 사실과 상상의 만남, 지금 우리 사극은 어디에 서 있을까.



 ◆역사를 지우고 판타지로=드라마는 기황후를 한국사 최초로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한 알파걸로 재조명하겠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캐릭터 설정이 기존 악녀 이미지와 충돌했다. 원 황후 이야기가 한국 사극에 적합하느냐며 ‘국적’과 역사의식을 따져 묻는 엉뚱한 비판까지 나왔다. 기황후의 상대가 엽기행각으로 악명 높은 충혜왕이라 논란이 더 커졌다. 방송 직전 충혜왕은 가상왕 유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역사왜곡 논란이 한낱 기우였다고 생각될 정도로 로맨스 판타지로 질주한다. 원에 끌려간 후 갖은 고초를 겪으며 약소국의 설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민족주의자 유왕(주진모)과 원에 의해 부모를 잃고 복수심을 불태우는 남장여자 기승냥(하지원), 궁녀가 된 기승냥을 사랑하는 원나라 황제 타환(지창욱)의 삼각 로맨스다.



 타환은 원의 실세인 연철 일당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처지다. 타환과 정략결혼한 연철의 딸 타나실리(백진희), 천방지축 맹랑한 타나실리와 기싸움을 벌이는 태후(김서형) 등 궁중 여인들의 갈등이 더해진다.



 공녀가 원나라 황후에 올랐다는 설정 하나만 빼고 나면 완벽한 창작.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판타지 로맨스다. 원나라 배경이란 것도 의미가 없다. 중국풍의 이국적 화면 위에 펼쳐지는 ‘해를 품은 달’ 류의 국적불명, 시대불명 로맨스다.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역사왜곡 논란을 불사하면서 기황후란 실존 인물을 끌어온 이유를 찾기 힘들다. 기황후 이름만 빌려온 순전한 판타지. 차라리 완전 가상극으로 가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평했다. 대중의 기존 역사 인식과 충돌하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때는 충분한 근거를 갖춰야 하는데 이마저 포기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빤한 3각관계 되풀이=기황후 스토리를 뻔한 삼각관계, 궁중 비사 수준으로 풀어낸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컸다. 악녀로 규정된 인물을 비틀어 권력과 인간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파고들거나,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찾아보기 힘든 것. 노광우 고려대 연구원은 “원나라판 여인천하, 원나라판 동이”라고 꼬집었다.



 역사왜곡 논란을 의식한 탓인지 ‘기황후’는 초반부 유왕을 정의로운 민족주의자로 강조하며 선악 도식을 끌어들였다. 홍석경 서울대 교수는 “이런 단순한 구도 속에서 민족주의, 사대주의, 코스모폴리타니즘 같은 쟁점을 제대로 풀어갈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손병우 충남대 교수는 “기황후와 원나라는 나오는데, 충혜왕 자리에 유왕이라는 다른 이름의 인물을 앉히고 가상의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엽기적인 변명”이라며 “역사왜곡을 판타지로 감추려는 태도는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꽃미남 왕으로 시선 끌기=로맨스 구도로 치달으면서 만화적 상투성도 이어졌다. 다음주 예고 중 지창욱이 빨래터로 하지원을 찾아가 구애하는 장면은, ‘장옥정, 사랑에 살다’ 중 숙종(유아인)·장옥정(김태희)의 빨래터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창욱은 20%에 가까운 시청률을 견인한 주역으로 꼽혔다. 불안하면서도 순수해 보이는 황제 연기에 흡인력 있는 외모가 사극에서 진가를 발휘했다는 평이다. ‘해를 품은 달’의 김수현, ‘장옥정’의 유아인을 잇는, 꽃미남 왕의 재현이다.



 ‘기황후’는 판타지에 전념하는 최근 TV사극·팩션(팩트+픽션)의 경향을 보여준다. 허구로도 모자라, 논란의 실존 인물을 그저 눈길 끄는 주인공 정도로 들러리세우는 무리수도 두었다. 역사왜곡 논란으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고, 정작 역사와 아무 상관없는 이국 취향의 로맨스로 시청자를 유인하는 식이다.



양성희 기자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 (임영호 부산대 교수): ‘황후뎐’ 정도의 제목의 가상극이었다면 훨씬 나았을 듯.

★★★ (양성희 기자): 로맨스의 동력이 되는 ‘신의 한 수’ 지창욱으로 기사회생.

★★★ (허은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초라하지 않게 돈 쓴 것 같은 ‘때깔’, 볼거리의 매력.

★★★ (홍석경 서울대 교수): 포부에 비해 역량이 많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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