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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의 시시각각] 시화호의 철새가 텃새 된 까닭

중앙일보 2013.11.19 00:30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윤호
논설위원
지난 주말 안산의 시화호 갈대습지. 입구 도로변은 차량들로 빼곡했고, 갈대숲 사이의 탐방로는 가을 정취를 즐기는 이들로 가득했다. 일렁이는 갈대를 카메라에 담는 이, 겨울 철새를 관찰하는 이, 가족과 손잡고 그저 걷는 이….



 2002년 한국수자원공사가 국내 최초로 조성한 이 인공습지는 연간 30만 명이 찾는 환경 생태계가 됐다. 방송사 카메라맨들도 시화호의 철새를 찍으러 자주 온다. 지난 5월엔 JTBC가 철새였다가 이곳에 텃새로 눌러앉은 뿔논병아리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시화호가 어떤 곳인가. 정부의 간척계획으로 1994년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인공호다. 오염 대책 없이 만든 시화호는 처음부터 ‘죽음의 호수’였다. 정부는 용을 썼지만 결국 2001년 담수화 계획을 포기하고 바닷물을 순환시키고 있다. 그래서 시화호는 말만 호수이지 해양수산부 관할이다.



 시화호에 생태계가 자라난 비결은 무엇일까. 정부의 환경대책? 천만의 말씀이다. 정부는 오염의 원인 제공자다. 그럼 시행자인 수공의 노력? 아니다. 수공 간부들은 96년 감사원의 수질오염 감사로 문책을 당했다.



 답은 개발과 환경을 둘러싼 지역 갈등 조정기구인 ‘시화지구 지속가능발전협의회(지속협)’에서 찾는 게 낫다. 이는 2004년 환경단체, 학자, 정부 대표, 지방 공무원, 지방의원, 수공 간부 등 50여 명으로 구성된 기구다. 협의회지만 협의만 하는 곳이 아니다. 환경과 개발사업에 대한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구다. 2008년 국토교통부 훈령에 따라 법적 지위도 얻었다. 어떤 사업이든 여기에서 ‘고(Go)’ 하면 가고, ‘스톱’ 하면 못 간다.



 지속협은 시화호 개발사업과 오염대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했고, 정부와 수공도 그 결정을 존중했다. 주민참여형에다 지역밀착적인 지속협의 결정들은 서서히 성과를 냈다. 손님이 뚝 끊겼던 오이도의 횟집과 조개구이집이 다시 번성한 것도 그 덕이 큰 셈이다.



 이곳의 의사결정 방식은 독특하다. 민주주의 원리인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제다. 다수결로 하면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이게 또 다른 갈등의 불씨를 남기기 때문에 끝까지 합의를 본다. 만장일치는 늦더라도 결정만 되면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 한다. 지속협과 오래 일해 온 강성귀 수공 녹색도시처 팀장도 이에 동의한다. “합의를 거쳐 가는 게 가장 빨리 가는 길입니다. 시간이 걸리는 듯해도 그게 가장 빠릅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누군가 끝까지 드러누우면 일이 안 될 텐데. 이에 대해 서정철 지속협 의장은 공동학습과 집중토론으로 설명한다. “모두 치열하게 공부했기에 가능했죠. 내가 알면 너도 알고, 네가 알면 나도 아는 수준이 되면 억지가 안 통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잠 안 자고 열 몇 시간씩 토론해 보세요. 충분히 숙의를 거친 결정이므로 나중에 반발이 일어나지 않죠.”



 외부 단체를 배제한 것도 중요하다. 그 결과 개발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경직성에서 벗어나 주민의 실질적인 이익을 위한 논의가 가능했다. 지속협이 격론 끝에 골프장 건설에 합의한 게 대표적이다. 물론 비판도 나온다. 주로 원리주의적 환경론자가 공격한다. 정부에 들러리 섰다, 개발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너무 인색할 이유는 없다. 전국 어디에 이만큼 성공적으로 갈등을 풀어낸 곳이 있나. 게다가 지속협 덕에 개발사업에서 뭔가 뜯어먹으려는 토건업자·토착세력 등 ‘파리떼’도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만 해도 큰 성과 아닌가.



 다른 지역에도 이런 모델이 통할까. 아쉽게도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정부가 대형사고를 친 뒤 다급한 수습책으로 등장한 특수 사례라는 점에서다. 송전탑으로 시끄러운 밀양에 갑자기 지속협을 만든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나. 다만 갈등의 지뢰밭을 건너기 위해 연구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런 면에서 시화호의 진짜 볼거리는 갈대숲과 철새보다 지속협 중심의 갈등 관리 방식이다.



남윤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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