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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느낌 아니까'

중앙일보 2013.11.19 00:28 종합 28면 지면보기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친구를 만났다. 한동안 소식이 뜸해 궁금했던 친구다. 오랜 세월의 때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녀에게 "어머, 어쩜 넌 10년 전 그대로다. 하나도 안 변했네” 했다. 그런 상황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으레 그런 인사들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아니 넌 요즘 힘든가 보다. 양평 산다는 얘긴 들었는데 참 많이 변했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 같이 앉아 있는 내내, 그녀가 전해준 옛 친구들 소식이며 재미있는 얘기들이 전혀 반갑지도 재밌지도 않았다. ‘사실 너도 많이 변했어’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동네 중국집 짬뽕을 예쁜 접시에 건더기만 건져 담은 것 같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맛집으로 뽑혀 유명하다는 해물 스파게티를, 해물만 대충 먹고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서둘러 그녀와 헤어졌다.



 서운했던 그녀의 인사말. 말이야 바른 말이다. 길거리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 변하긴 많이 변했다. 힘든 것도 같고, 지친 것도 같고. 외모를 포기한 듯, 치장하는 걸 잊은 듯. 요즘, 밤이나 낮이나 드럼 친다고 거울도 없는 연습실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가. 아마도 연습실에 거울이 없는 게 큰 이유일 게다. ‘거울도 안 보는 여자’라는 노래도 있던데. 웃음이 났다.



 예상보다 친구와 빨리 헤어진 탓에 넉넉해진 자투리 시간. 젊고 쌈빡하게 변신하자 싶어 쇼핑을 갔다. 최신 유행의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 두 시간 이상이나 매장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젊은 아이들 옷 일색이다. 내 차림새가 의류매장 직원들이 원하는 행색이 아니었는지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요즘 유행하는 스키니진을 한번 입어보고 싶어서 만졌더니 옷을 빼앗듯이 잡아 옷걸이에 다시 걸며 "아줌마 사이즈 없어요” 한다. 친절해 보이는 직원이 있는 다른 집으로 갔다. 입으면 날씬해 보일 것 같은 레깅스를 이리저리 들쳐보았더니 "따님 사주시게요?” 한다. 딸 선물 사는 척하고 하나 살까도 생각했지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멋 내기 적합한 나이는 이미 지났나 보다.



 힘들게 보인다는 친구의 말보다도 더 서운했던 옷가게에서의 왕따 취급. 이상하게 난 이럴 땐 늘 배가 고프더라. 양은냄비를 꺼냈다. 송송 썬 파와 계란을 넣어 꼬들꼬들 맛있게 끓인 라면을 먹고는 소파에 벌렁 누웠다. 나이 든 사람들이 스키니진이나 딱 붙는 레깅스를 입으면 왜 안 될까. 건강 때문에? 외국에는 그들의 건강과 체격까지도 고려하여 신축성도 뛰어나고 입으면 날씬하게 보이는 스키니진도 있고, 입으면 그다지 민망하지 않은 레깅스도 많이 있던데. 우리나라 옷가게는 온통 젊은이들 옷뿐이다. 옷이나 화장이나 다 젊은이들 몫이다.



 외국에서 온 친구가 그러더라. 서울엔 평일에도 파티가 자주 있는 모양인지 길거리에 온통 파티 차림새의 여자들뿐이라고. 어쨌거나 보기엔 좋더란다. 글쎄 칭찬인지 욕인지. 외국에선 외모에 유난히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다 오십, 육십을 훌쩍 넘긴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이 치장할 때는 특별한 모임이나 파티 때뿐이고 평일에는 다들 민낯으로 일하느라 바쁘다.



 비교하긴 좀 뭣해도, 사람과 식재료를 한번 비교하자면. 싱싱한 재료는 양념을 적게 써서 재료 고유의 맛을 그대로 살려야 맛있는 음식이 된다. 젊을 때 치장을 많이 하면 젊음 고유의 멋이 가려져 맛있는, 아니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싱싱한 재료에 갖은 양념범벅을 해봐라. 그 음식이 그 음식, 그 재료가 다 그 재료다. 양념범벅 음식 맛이 다 비슷비슷 양념 맛만 나듯이, 잔뜩 치장한 젊은 사람들도 다 비슷비슷 똑같은 화장발 멋이다. 한 공장에서 막 출고되어 나온 인형들 같다. 개성이 없다.



 정말 멋을 부려야 하는 건 오히려, 그다지 신선하지 못한(?) 몸을 가진 나이 든 사람들이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그들이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화장도 즐기고 멋도 개성도 표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이즈와 색상의 옷과 구두, 장신구 등이 많아진다면. 또 그 많은 동대문 의류상가 건물 중 한두 곳쯤은,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 나이 든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 된다면. 참 좋겠다.



 그들도 ‘그 느낌 아니까’.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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