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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20세기 분열된 문명 바라본 서사시인' 레싱 떠나다

중앙일보 2013.11.19 00:23 종합 23면 지면보기
2007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이 2008년 1월 영국 런던의 미술관 ‘월리스 컬렉션’에서 상패를 든 채 웃고 있다. [로이터=뉴스1]


“오 이런! 별로 신경 안 써요.”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은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기 위해 런던 집 앞으로 달려온 기자들에게 차분하게 이렇게 말했다. 헝클어진 흰 머리카락, 푸른 치마와 낡은 신발 차림으로 계단에 주저앉아 얘기하는 레싱은 그저 평범한 동네 할머니였다.

역대 최고령 노벨문학상
소설『황금노트북』등 남겨



 88세에 여성 작가로는 11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레싱이 17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94세. 레싱의 작품을 출판해온 영국 출판사 하퍼콜린스는 “레싱이 일요일 아침 일찍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그는 50편 이상의 소설과 수필·시를 남겼다.



 노벨 문학상 역대 수상자 중 최고령이었던 레싱은 집 앞의 기자들에게 “나는 88세요. 스웨덴 한림원이 죽은 사람에게는 노벨상을 줄 수 없으니까 아마 죽기 전인 나에게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나 봐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한림원은 레싱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회의와 뜨거운 열정, 통찰력으로 분열된 문명을 바라본,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그린 서사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20세기 여성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해낸 화신’으로 그를 소개했다. 레싱은 나이가 많아 시상식엔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런던에서 진행된 기념식 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레싱은 아프리카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한때 몸담았던 공산당 경험을 작품에 녹여냈다. 1950년 첫 작품 『풀잎은 노래한다』 발표 후 『어두워지기 전의 여름』(1973), 『다섯째 아이』(1988)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 작품은 1962년 출간된 자전적 소설 『황금노트북』이다.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내적 삶을 그렸다.



 비평가들은 『황금노트북』을 쓴 레싱을 ‘20세기 최고의 페미니스트’로 극찬했지만 정작 그는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레싱은 1919년, 지금은 이란 땅인 페르시아 케르만샤에서 태어났고 1927년 영국인 부모와 함께 현재 짐바브웨인 남로디지아 지역으로 이사했다. 두 차례 이혼한 뒤 런던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정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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