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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인문학의 보고 한국화, 오늘을 비추는 거울

중앙일보 2013.11.16 00:10 종합 23면 지면보기
혜원(蕙園) 신윤복(1758~?)의 ‘여인의 팔을 당기는 남정네’는 정확한 인물 묘사와 풍광을 표현한 아련한 필치가 돋보인다. 이에 못지않게 배경의 괴석과 배롱나무가 당시 얼마나 값비싼 귀물이었는가 알려주는 게 이 책의 관점이다. [사진 태학사]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

태학사, 552쪽

3만5000원



이 책의 제목 머리에는 ‘우리시대 인문학자 32인의 그림읽기와 문화 그리기’라는 메김말이 붙어 있다. 처음 이 책을 대하는 독자라면 도대체 무슨 책인가 감이 안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 읽으신 분이 있을 것도 같은데 2년 전에도 비슷한 책이 나온 바 있다. 그 책 제목은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이고, 책머리에는 ‘젊은 인문학자 27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감이 잡힐 것이다. 옛 그림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다양한 접근이다. 옛 그림 읽기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내가 그 전공이다. 그러나 32명의 필자들은 옛 그림 읽기라는 것이 어디 ‘면허 난 사람’만 얘기한다더냐는 식으로 각자의 전공에 따라 자신이 본 대로, 탐구한 대로 서술해 간 것이다.



 예를 들어 혜원(蕙園) 신윤복이 그린 ‘여인의 팔을 당기는 남정네’를 그린 춘화에 프롤로그 같은 그림이 있다. 내가 이 그림을 보는 시각은 인물묘사의 정확성과 괴석(怪石)과 나무를 표현한 아련한 필치이다. 그러나 필자는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괴석과 배롱나무가 당시 얼마나 값비싼 귀물이었고 중국산 태호석(太湖石)이 어떻게 수입돼 18세기 대가집에 장식되었는가를 논증한다. 그러면서 뼈있게 한마디 던진다. “감각의 제국은 언제나 시대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이 책의 필자들이 핵심을 멀찍이서 관조하는 것은 마치 동양화의 공염법(空染法)이라는 기법을 연상케 한다. 달을 그릴 때 달무리를 그림으로써 빈 칸이 달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그림의 저변만 맴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번 책에서 나는 이인상의 명작 ‘검선도(劍僊圖)’에 나오는 취설옹(醉雪翁)이 유후(柳逅)라는 선배 문인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석사논문으로 이인상을 쓰면서 그가 누구인지 몰라 당시 ‘문학사상’에 누가 알면 가르쳐 달라는 수필까지 쓴 적이 있다. 30년 묵은 궁금증이 후련히 풀렸다.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총 5부로 구성됐다. 제1부 ‘마음 그림, 가슴을 열다’는 그림을 감싼 인간의 정과 내면으로 안내한다. 우정과 교감, 고독과 위안, 자기 응시와 보편적 이상이 한자리에 묶였다. 제2부 ‘감각 그림, 그 감각의 세계’에서는 보고 만지고 즐기려는 몸의 요구가 빚어낸 감각의 영토를 담았다. 입맛과 향기, 파초에 듣는 시원한 빗방울과 댓잎에 깃든 인격의 탄력이 감촉된다. 제3부 ‘사연이야기를 품은 그림’은 숨겨진 그림 이야기의 방으로 초대한다. 사연의 적층 위에 떠오른 흔적과 기록이 흥미롭다. 제4부 ‘표상 그림이 감싸 안은 국가’는 국가적 차원에서 기억되고 기호화된 광경이다. 나라든 제왕이든 자신의 격에 어울리는 상징과 형식을 입어야 비로소 표상성이 획득됨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제5부 ‘소통 그림, 세계를 보다’를 살피다 보면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로 진출한 선조들의 모습이 확인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3국의 수준 높은 옛 그림 등 이미지 230여 개를 통해 오늘의 ‘나’를 반추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선택한 소재는 정말로 다양하다. 신한평의 ‘젖먹이는 어머니’, 이재관의 ‘파초’, 김홍도의 ‘단원아집’, 궁궐의 ‘일월오봉도’, ‘상감청자 운학문 매병’, ‘일본 소설 속의 조선 풍속화’…. 이런 그림들을 매개로 필자들은 그들 말대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종횡무진 구사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내심 얼마나 흐뭇한 마음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다름 아니라 우리시대에 이런 집체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서 우리 한국학과 인문학의 희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32명의 필자 중 내가 수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학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모두가 학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인지라 누가 무엇이 전공인지는 동업자(?)로서 이름 석자는 알고 있다. 한국사·한국문학사·한국한문학사·한국철학사·중국문학사·동양사상사·한국미술사·한국복식사 등등 한마디로 한국학 내지 인문학의 중견학자들이다.



 이들은 계간 학술지 ‘문헌과 해석’팀이다. 이들은 10여 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다 같이 모여 차례로 발표하면서 기탄없이 토론하고 그렇게 수렴한 성과를 이렇게 책으로 펴내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우리 인문학이 위기다, 우리 학문은 학제간의 교류가 없는 것이 병폐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대신하여 말한다. 우리의 젊은 인문학자들은 그 흔한 연구비 한 푼 지원받지 못해도 스스로가 신이 나서 이렇게 우리 인문학을 가꾸어가고 있다고. 이번 주 금요일에도 이들의 모임이 있었을 것이고 2년 쯤 뒤엔 또 한 권의 책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문학은 살아 있음을 이 책은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유홍준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 미술저술가.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7, 일본편 1~2), 『화인열전』『완당평전』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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